"말이 좋아 서울이지, 상계동에서 한 시간 넘게 지하철 타고 왔더니 설명도 없이 선고를 연기한다네요. 온갖 눈치 보면서 연차 내고 왔는데, 다음엔 또 어떻게 올지 막막합니다."
재판부가 판결 당일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고 선고를 연기하는 바람에 민원인들이 헛걸음을 하는 일이 잦아 원성을 사고 있다. 법원은 '국민과의 소통'을 모토로 내걸고 있지만'재판부의 제멋대로 선고연기' 행태를 제도적으로 방지할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뒷짐만 지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지난 2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재판 선고(소가 2,000만원 이상 사건 기준) 114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선고 날로 예정돼 있다가 당사자에 대한 통지 없이 선고 당일이나 하루 전 미뤄진 사건은 모두 27건에 달했다. 전체 선고의 23.7%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특히 한 재판부는 선고하기로 했던 14건 중 8건을 당일에 미뤄 재판 당사자 10여명이 발길을 되돌리기도 했다. 이날 선고를 한 재판부 12곳 가운데 사건을 미루지 않은 재판부는 단 한 곳뿐이었다.
다음 날 상황도 비슷했다. 21일 예정됐던 총 196건의 선고 중 25건(12.8%)이 선고 직전 미뤄졌고, 이날 온전히 선고일정을 제대로 진행한 재판부는 17곳 중 4곳에 불과했다.
이러다 보니 법원을 찾은 당사자들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거래처와의 민사소송 선고가 예정돼 법원을 찾았던 A씨는 "달랑 연기됐다는 말만 하면 일반인들은 막연한 불안감 속에 남은 날들을 살아야 한다"며 "판결의 전권을 쥐고 있는 재판부에 드러내놓고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속만 타 들어 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판부의 선고 당일 선고연기가 횡행하는 것은 정해진 선고날짜를 다시 바꾸는 '기일 변경'의 경우 재판부가 당사자에게 미리 의무적으로 통지하게 돼 있는 반면 '선고연기'는 사전 통지 없이 법정에서 즉석으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선고연기를 결정한 일부 재판부가 선고 전날 실무관을 통해 당사자 또는 법률 대리인 측에 전화 통지를 하기도 하지만, 이는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건너뛰는 경우가 많다"며 "강제할 방법이 없는 이상, 재판부 의지에 따라 재판당사자들의 삶이 바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판사들은 이에 대해 재판의 돌발적인 성격과 과도한 업무 등으로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재판을 하다 보면 판결문을 다 써놓고도 선고 하루 전날 밤 재검토 필요성을 느끼기도 한다. 이럴 때는 통지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같은 법원의 한 부장판사도 "시급히 결론을 내려야 하는 중요 사건이 재판부에 있으면, (선고 연기 통보를) 실무관에게 지시할 여유도 없을 만큼 바쁘다"고 말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선고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재판 당사자의 절박한 입장을 고려한다면 사전통지를 위한 시간적 여력을 얼마든지 낼 수 있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화장실 갈 시간에 전화 한 통만 하면 되는데 바쁘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라며 "재판 일정 관리만 꼼꼼하게 하면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현재로선 무책임한 선고 연기를 막을 제도가 없지만, 법원행정처에서 제도를 개선하거나 신설하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라고 밝혔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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