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기념일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예컨대 크리스마스나 석가탄신일처럼 특정 종교 전통에서 비롯한 날을 그 종교의 믿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까지 모두 기념하는 이유는? 일반론적인 답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이고 공동체 속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인생은 짧아도 똑같은 매일 매일의 이어짐만큼 무서운 것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저러한 날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러저러한 행위로 그 날을 특별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또 자기 폐쇄적인 삶을 살다 덧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아서 인간은 소소하든 거창하든 기념일을 새기고 만나고 모이고 나눠온 것일 수도 있다.
성탄절 오후 나는 덕수궁 대한문 옆 ‘쌍용차 정리해고노동자 분향소’를 찾았다. 영하 10도의 매서운 한파를 겨우 비닐 몇 장 겹친 천막으로 막아내고 있는 그 분향소는 4월에 설치됐다. 그러니 벌써 9개월을 길거리에 나앉은 채, 2009년 쌍용차 사측의 구조조정 이후 생의 막다른 곳으로 내몰리고 목숨마저 잃은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있는 것이다. 22번 째 희생자의 죽음이 알려진 그즈음부터 이곳을 찾으려했지만 바쁘다는 지극히 뻔하고 태만한 이유로 찾지 못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라는 어쩌면 나 개인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날 첫 발걸음을 했다. 쌍용차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서명지에 서명을 하고, 약간의 후원금을 내고, 현장의 한 분과 짧은 얘기를 나눈 것이 이날 내가 한 일의 전부다.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그 일을 하기가 여태 쉽지 않았다. 그럼 크리스마스 당일 나를 움직인 힘은 아기 예수에게서 나왔는가? 아니면 이 같은 날에는 ‘사랑을 실천하라’는 어린 시절 학습한 미덕에서 나왔는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힘은 나 개인의 작은 행복이 우리 사회 전체 대의적 차원의 행복과 분리돼서는 결코 완전하게 얻어질 수 없다는 공리에서 왔을 것이다. 그 공리가 잠들어 있다가 18대 대통령 선거를 지나고 문득 크리스마스 날 깨어난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분향소를 향해 바삐 걷는 내게 그것만큼 가치 있고 중요한 무엇은 없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 한 카드회사가 ‘컬처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주최한 ‘팀 버튼전’ 관람객 인파와 마주쳤다. 또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무리를 헤치며 걸어야 했다. 그 와중에 머릿속으로는 소위 지식인의 관성처럼 글로벌자본주의가 열을 올리는 자본 맞춤형 문화 기획에 대해, 상업적 여흥의 전형이 된 우리시대 연애에 대해 냉소적인 비판을 반복했음을 고백해야겠다.
하지만 나라고 뭐가 다를까. 공식 직함 ‘전국금속노동조합 쌍용차지부 대외협력부장’이라는 예의 노조원과 대화하기 전까지 나 또한 반쯤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 ‘농성장’이라 이름 붙인 그곳, 쌍용차 정리해고 희생자 분향소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주민 및 용산참사 희생자 유족들이 모여 있는 천막을 둘러보며 적당히 만족하려는 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렵사리 시작한 대화 속에서 그 노조원은 ‘결국 정치권의 구조적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한 이 같은 저항이 무슨 소용이냐’는 내 회의적인 질문에 ‘나비효과’를 들어 답했다. 대한문 옆에 그처럼 작고 허약하게 존재하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한국노동현실의 위기와 고통을 일깨워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족의 생계와 안위를 생각하면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 꿈이어야겠지만, 사실은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다. 노동운동가로 사는 거리의 삶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 속에서 우리는 행복이 개인의 이익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대의와 연결된 문제라는 점을 읽어내야 한다. 18대 대통령이 될 박근혜 당선인은 ‘국민행복’을 국정 모토로 내걸었고 ‘중산층 복원’을 핵심 정책으로 삼았다. 헌데 행복은 특정 층이 아니라 크고 작은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기념일이 시공과 차이를 초월해 대소 및 안팎을 엮어주듯이.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 교수
강수미 미술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