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두고 한국방송학회는 여야의 방송 관련 정책 공약을 설명 듣고 토론하는 행사를 가졌다. 선거 캠프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공약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고, 학계나 현업 종사자들에게는 차기 정부의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다고 기대했으나, 준비과정에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민주통합당과는 달리 새누리당 측 누구도 이 토론회에 나오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행사는 진행되었으나, 행사를 기획했던 입장에서 분명하게 느낀 점이 하나 있었다. 박근혜 후보 캠프는 방송 관련 정책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칫하다가 구설수에 오를 확률만 높은, 계륵같은 정책이었다.
이제 박근혜 후보는 당선인으로 신분이 바뀌었고, 새누리당도 쏟아냈던 공약들을 실행 가능하도록 챙겨야 하는 때가 되었다.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방송 정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새누리당이 내놓은 선거 공약집의 방송 관련 내용은 원론적이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 적합하도록 법률을 정비한다고 한다. 인터넷 표현의 자유도 보장하며, 콘텐츠 산업 활성화에도 노력한다고 했다. 의아함과 불안함이 생긴다. '공공성'에 대한 무심함 때문이다. 방송 및 통신과 관련된 '새누리의 약속'에는 27개의 항목이 있지만 거의 모든 항목은 기술, 산업, 심의에 관한 내용이다. 방송의 공익적 책무를 강화하는 내용은 딱 하나,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이라는 한 줄 뿐이다. 경제 발전도 좋고 일자리 창출도 좋지만, 방송 정책의 무게추가 '산업'으로만 기운다면 방송에 부여되어 왔던 교육, 교양, 정보 제공, 여론 수렴 등의 기능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가 방송통신위원회로 통합되었고, 시간이 가면서 방송정책은 옛 정통부 관료들의 소관이 되었다. 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콘텐츠진흥원으로 흡수되면서, 방송정책의 싱크탱크는 언젠가부터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되었다. 언론이나 문화 개념보다는 경제와 경영이 강조되었고, 방송의 산업규모가 통신에 비해 턱 없이 왜소하다는 현실은 방송 본연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을 구차하게 만들었다. 공약집 문구만 보자면 박근혜 정부도 이 기조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ICT 전담 부서 신설에 관한 논의가 오가는 것도 기본적으로 방송을 통신산업의 부록 정도로 간주하려는 분위기의 반영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방송 관련 공약을 떳떳하게 홍보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지금 우리나라 방송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방송정책은 방송의 사회문화적 역할에 대한 재고로 시작되어야 한다. 공영방송과 상업적 콘텐츠 제작자ㆍ제공자를 구별해야 하며, 산업 논리가 공공성을 침해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방송의 공영성 회복을 위한 '의지'를 보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 MBC 문제의 해결 노력이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 당선인은 선거 기간 중 정수장학회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MBC 중역과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민영화 전략 논의가 새어나가 파문이 일기도 했다. 그 와중에 MBC 뉴스는 공정성과 품질, 시청률 면에서 바닥을 쳤고, 김재철 사장은 알짜배기 인력들을 해고하거나 전보시켰다. 직원들을 상대로 195억원의 손배소를 제기하고 가압류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공영방송 MBC를 제 자리로 돌려놓는 노력을 보이는 일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있다. 방송의 공영성은 물론이거니와, 언론 자유와 사회 통합에 대한 의지까지 보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MBC 사태 해결은 박근혜 정부의 방송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수 있다.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류의 공허한 립서비스를 할 시기는 지났다. 이명박 정부와는 다른, 공정과 통합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나서야 한다. 방송은 통신 산업의 일부도 콘텐츠 산업과 동의어도 아니기 때문이다. 돈보다 훨씬 중요한 이 사회의 '가치'에 관한 일이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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