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대구의 중학생 권승민(당시 13세)군의 자살을 계기로 학교폭력 문제는 올 한 해 내내 사회적 이슈가 됐다. 아들의 죽음 이후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전사'로 나선 권군의 어머니 임지영(48ㆍ중학교 교사)씨는 "새해에는 다시는 학교폭력으로 학생이 자살했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으면 한다"며 "폭력 없는 학교를 만드는 데 가정과 학교는 물론 우리사회 모두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저녁 대구 수성구 임씨 가족이 사는 아파트. 숨진 권군의 방은 권군이 생활하던 당시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책꽂이 침대 이불, 모두가 그대로다. 임씨는 철마다 이불을 갈아준다고 했다. 하지만 권군의 모습은 책상 위의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다. 형 친구가 접어준 1,000마리의 종이학, 권군이 숨지기 직전에 구입했다는 초록색 트리, TV프로그램 '무한도전'을 유독 좋아했던 권군을 위해 임씨의 동료 교사가 구해준 무한도전 달력, 권군의 1주기를 맞아 임씨가 꽂아둔 하얀 국화꽃이 자리를 지켰다.
임씨는 그날 이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아들의 책상 앞에 앉아 기도한다고 했다. 아들과 학교폭력으로 희생된 다른 아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지금도 학교폭력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아이라서 따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데, 지난 19일 형 친구들이 아이가 투신한 곳에서 제를 지냈어요. 기특하죠?"
2012년은 임씨 가족에게 고통의 연속이었다. 안동에서 교편을 잡던 권군의 아버지(48)는 명예퇴직했다. 형(17ㆍ고2)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권군의 아버지는 "지난 1년 간 온 식구가 가장 많이 한 일은 병원에 간 것"이라며 "불면증과 우울증 등으로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가족들은 많이 나아졌지만 임씨는 아직도 약을 먹고 있다. 약 기운을 이기려고 출퇴근할 때 혹한에도 창문을 열고 운전한다.
사회 일각의 왜곡된 시선도 그들을 힘들게 했다. 민ㆍ형사 소송 중에 나온 '제 자식 죽었다고 남의 자식 평생 범죄자로 살게 할거냐' '수십억원의 보상금을 받았다'는 등의 말이 야속했다. 임씨는 "그런 말 때문에 건강이 더욱 악화됐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니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러나 학교폭력은 반드시 근절돼야 하고 내가 가르치는 학교에서, 그리고 우리사회에서 학교폭력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애쓰겠다"고 말했다.
임씨는 학교폭력을 단지 학교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총체적 모순의 결과라고 분석했다. "잘못을 저지른 정치인이나 재벌들이 그대로 풀려나오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잘못을 하고도 '저 교도소 안가요' 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런 괴물을 우리사회가 만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제 자식만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 풍토, 학교폭력을 애써 외면하고 감추려는 학교가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그는 "'맞지 말고 때리고 와라'고 가르치는 부모, 학교폭력이 이슈가 되면 태권도학원이 미어터진다는 보도는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임씨는 지난 7월 를 펴내 학교폭력의 무서움과 피해자의 고통을 알렸고, 최근에는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교육용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매일 '학생파일'을 작성케 하는 등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1년 간 사회적으로 학교폭력 근절을 위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평가한 그는 "급조한 대책으로 일부 논란도 있었지만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가해자들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일지 모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벌을 다 받고 우리 아이 몫까지 열심히 산다면, 그때 가서 자연스럽게 미움이 없어질는지 모르죠."
대구=정광진기자 kjche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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