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과정에서 재계는 확실히 박근혜 후보를 선호했다. 보수성향인 점도 같았고, 지금의 대기업을 가능케 한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도 그렇고, 무엇보다 문재인 후보에 비해 경제민주화 요구가 훨씬 덜 과격했기 때문이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구호였던 '잘 살아보세'를 연상시키듯, "잘 살아보자는 일념 하나로 세계 속에 우뚝 일어섰던 실사구시의 국민정신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재계가 무작정 박 후보가 호락호락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문 후보 보다는 기업친화적이지만, 그렇다고 5년 전 MB식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와는 분명 차원이 다를 것이라고 봤다. 대선 당시 한 재계 고위관계자는 "스타일로 보면 박 후보 쪽이 훨씬 더 매섭고 비타협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26일 박 당선인과 첫 상견례를 가진 재계총수들은 긴장감이 역력해 보였다. 중소기업인들을 먼저 만나고 돌아온 박 당선인은 내로라하는 재계 총수들 앞에서 따끔한 일침을 계속 쏟아냈다. 대기업 총수들에 대한 존중과 경제회복을 위한 격려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톤은 재벌들에게 반성과 개혁을 강하게 촉구하는 것이었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특히 압권은 총수들 면전에서 오너 2ㆍ3세들의 사업확장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 박 당선인은 "서민업종까지 재벌 2ㆍ3세들이 뛰어들어 땅을 사들이는 건 기업 본연의 역할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역대 어느 대통령도, 재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대통령조차 총수들을 앞에 두고 그 아들 딸들의 행태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면서 "박 당선인의 재벌정책이 앞으로 얼마나 깐깐할 것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이날 회동을 통해 박 당선인이 '중소기업 우대'원칙이 확인된 만큼, 새 정부 출범에 맞춰 내놓을 '화답'마련에 본격 착수했다. 이날 박 당선인이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자제를 요구하면서 '가급적 정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당부한 만큼, 각 그룹들은 고용유지와 신규채용을 크게 늘리는 쪽으로 내년도 사업계획을 수정한다는 방침이다. 또 일감몰아주기 및 골목상권 침해 중단 등에 대한 선언도 잇따를 전망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박 당선인의 눈높이를 맞추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듯싶다. 조금이라도 위법행위는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유인호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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