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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헬프 미 헬프 어스

입력
2012.12.26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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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시인ㆍ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이번 성탄은 여느 때와 달랐다. 연이은 죽음의 소식들 때문이었다. 나는 망연한 가운데 생각했다. 왜 대선이 끝난 후, 자살의 연쇄가 시작됐는가? 타인의 죽음에 대해 섣불리 그 원인을 단정내릴 수 없다. 그러나 이 죽음들이 서로 무관하다고 단정내릴 수도 없다.

대선 결과는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신호를 보냈다. 21일 자살한 고 최강서 한진중공업지회 조직차장은 이렇게 유서에 적었다. “5년을 또 못하겠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다른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22일 자살한 고 이운남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초대 조직부장은 그의 죽음 소식을 듣고 몹시 힘들어했다고 했다. 같은 날 자살한 고 이호일 전국대학노조 한국외국어대학교 지부장은 부당해고 소송 과정에서 생계의 어려움을 겪었고, 복직 후에도 대학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 모든 개인적 정황들이 노조와 노동자들을 옥죄어 온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이번 대선은 그 환경이 당분간 개선되지 않으리라는 신호를 많은 이들에게 보냈다. 나 또한 그러한 신호를 받았다. 그 신호가 벼랑 끝에 내몰린 어떤 개인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신호가 되었던 것이다.

그 신호의 해석이 어떻게 죽음이라는 극단적 결정으로 이어졌는지 감히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죽음들이 하나의 신호로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연쇄는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그 무서운 신호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전달되고 받아들여질 때 발생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신호를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명수 심리기획자는 한겨레 신문 24일 자 칼럼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느낀 이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보내는 구조신호를 ‘헬프 미 징후’라고 불렀다.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 이제껏 도와달라는 신호들은 보내왔다. 헌데 그 신호들은 지금껏 외면당해왔다. 그리고 대선에서 돌아온 신호는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명수씨는 자신이 보기에 긍정적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능력과 의무를 가진 박근혜 당선인에게 “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살려 달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는 복잡한 심경에 젖었다. 화가 났고 또 서글펐다.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상황에 책임이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야 한다는 상황이 화가 났다. 그런데 그의 말 한마디가 어쩌면 정말로 죽음을 멈추게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러나 나는 또 생각했다. 우리는 권력자가 인간적 선의나 정치적 계산을 통해 긍정적 신호를 보내기를 그저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우리의 운명이 권력자의 의중에 달려 있다고 상상할 때, 우리의 운명은 정말 권력자의 의중에 달리게 된다. 그것은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효율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하는 민주주의적 기반을 고려치 않는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상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력자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호를 보내야 한다. 우리가 신호를 보내는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때의 신호는 “헬프 미 헬프 어스”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상황은 곧 우리의 상황이 될 수 있다. 현재의 노동자의 죽음이 어쩌면 미래의 우리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돕는 것은 바로 우리를 돕는 것이다. 이 같은 상상을 토대로 우리는 뭔가 당장 할 수 있다. 장례식장에 갈 수도 있고, 투쟁기금에 작은 돈이라도 보탤 수 있고, 농성장으로 달려갈 수 있고, 그들의 싸움과 연대할 수 있다. 그 외의 많은 행동들이 이 상상으로부터 출발 할 수 있다.

당신은 이 민주주의적 상상이 무력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 있다. 선거 결과를 고대하듯 권력자의 입술에서 “노동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또 그 말이 현실이 될 때까지 한없이 기다리는 것과 비교할 때 말이다. 아, 참, 그런데 생각해봤는가? 합리적인 듯 이모저모 계산하고 재보는 당신의 능력이 이 모든 문제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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