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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칼럼)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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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칼럼)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된다

입력
2012.12.2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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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결과는 승패를 떠난 통합의 시대적 요구를 의미

증오와 배제의 언어습관으로는 갈등 치유 기대 못해

이명박 당선인이 한창 꿈에 부풀어 있던 5년 전, 이경숙 당시 인수위원장이 별 생각 없이 말을 꺼냈다. “미국서 오렌지 달라고 했더니 못 알아들어 ‘아륀지’라고 했더니 알아듣더라.” 이 한마디가 MB정권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해버렸다. 이후 취임식에서 서민을 걱정하고 계층갈등 해소를 강조했어도 이미 국민 한 켠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

더 앞서는 대통령 스스로 말로 공(功)과 격(格)을 깎았다. 취임하자마자 “막가자는 거지요?”로 시작하더니 “대통령 못해 먹겠다” “군대 가서 썩지 말고” “국민이 나를 죽사발로” “그 놈의 헌법” 등으로 이어지다 “쪽 팔린다”로 끝을 맺었다. 거친 언어로 피아를 야멸차게 갈랐다. 노무현이 품었던 가치가 사후 재평가될 때까지, 대부분 국민이 손을 저으며 돌아 앉았다. 말이란 게 이렇다.

18대 대선을 승패 개념으로 보는 건 애당초 잘못됐다. 다수결과 승자 독식의 불가피한 선출구조가 갖는 착시다. 미묘한 변수 한 둘로도 승부가 달라질 수 있었고, 누가 이기든 이상할 것 없는 박빙의 레이스였다. 그러므로 각 절반씩 선택 받은 양 측을 겨우 3.6% 차이로 가르는 건 선거결과를 오독(誤讀)하는 것이다. 오히려 양쪽을 동등하게 봐야 한다는 시대적 주문으로 읽는 것이 맞다. 그래서 다시 통합이다. 당선 쪽은 다만 이 역할을 감당할 직접 책임을 떠안은 것뿐이다.

일견 여건이 그다지 나쁘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양 진영의 공약이 칼로 자르듯 차이 나지 않았다. 칼바람 현실 앞에서 이념은 부쩍 왜소해졌다. 민생해결의 방법론에서 작은 차이로만 흔적이 남았다.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 간의 구분도 희석됐다. 가중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누구도 두 가치의 역사적 기여를 아예 삭제하려 들진 않는다. 지역, 세대 갈등이 여전해 보여도 여러 변인들이 들쭉날쭉 얽혀 접점은 더 많아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 상황은 더 나쁘다.

대학에서 대선평가를 기말논술 주제로 냈다. 광주가 고향인 한 학생의 답안을 오래도록 손에서 놓지 못했다. ‘주변 친척 아무도 새누리당 지지자가 없는데 대기업 다니는 사촌형만 예외였습니다. … 이모는 아들에게 투표하면 김치를 보내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형이 마지못해 결국 수긍했다는 말에 웃었습니다. … (당선인은) 호남을 둘러보십시오. 그곳은 초상집 분위기입니다.’ 우리사회의 갈등이 논리를 넘은, 감정과 정서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일화다. 통합의 해법이 논리나 설득이 아니라 ‘치유’여야 한다는 뜻이다.

박근혜 당선인의 첫 인사에서 불안한 기시감(旣視感)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래도 치유와는 닿지 않아 보이는 한 구석이 마음에 걸리는 탓이다. 누구나 정치적 견해를 갖지만 문제는 표현 방식이다. 최소한 언론인을 포함한 지식인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거칠고 독한 말로 감정을 여과 없이 발산하고, 생각과 가치가 다른 편을 매도해선 안 된다. 그런 독선과 무례야말로 논리를 무력화하고 치유 힘든 감정적 간극을 키우는 주범이다.

그렇지 않아도 증오의 언어가 도리어 역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대선토론에서도 여실히 입증됐다. 벌써 인선을 두고, 없던 공방이 격렬하게 불붙었다. 문제 된 인물이 썼던 ‘정치적 창녀’ 같은 섬뜩한 표현들이 온ㆍ오프라인의 공론장을 오염시키는가 하면, 잠시 주춤했던 진영 싸움도 조기 재연되는 조짐이다. 첫 인선에서 친박, 영남을 배제한 모처럼의 탕평 시도도 이 와중에 단박에 퇴색했다.

정책은 멀되, 말은 가깝고 즉각적이다. 이제부터 당선인 측에서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곧바로 새 정부의 틀과 장래, 그리고 국민 인식을 규정할 것이다. 5년 전, 10년 전 그랬듯. 인사를 보면 당선인은 아직도 말의 무서움을, 또 선거의 의미를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더 이상 실패한 정부는 안 된다. 그런데 어째,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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