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이번 대선은 사상 유례 없는 보수와 진보의 한판 승부였다. 향후 5년간의 한반도 정치지형을 판가름할 대선에서 과반수 국민은 현상유지를 선택했다.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진보진영에서 내놓은 현상변경의 ‘2013년 체제’는 당분간 실현할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경제민주화와 복지문제는 두 진영에서 경쟁적으로 공약을 내놓아 차별성이 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영을 극명하게 가른 것은 대북정책이었을 것이다. 진보진영은 전제조건 없는 대화를 통해서 이명박 정부 시기의 남북관계 단절을 하루 빨리 극복하고 남과 북을 연결하여 북방대륙으로 나가자는 구상을 밝혔다. 진보진영이 남북관계의 빠른 복원을 열망한 것은 분단체제가 고착화돼서 영구분단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보진영의 이런 조급함에 보수진영은 ‘종북좌파’, ‘안보가 불안한 세력’으로 매도하고 정권유지에 성공했다. 보수진영도 현재의 남북관계를 비정상으로 본다. 하지만 비정상을 초래한 상당한 책임은 북한의 도발에 있기 때문에 관광객 피살사건, 천안함-연평도 사태, 핵실험과 핵능력 향상, 장거리 로켓발사 등과 관련해서 북한이 먼저 사과 등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당선인 측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교류 협력을 확대하겠다는 ‘신뢰 프로세스’를 내놓고 북한이 먼저 신뢰를 보일 것을 희망하고 있다.
이에 맞서 북한은 당선인 측에 ‘공개질문장’을 내고 6·15와 10·4선언 외면, 자유민주주의질서에 기초한 통일 주장, 선핵폐기, 억지력 강화와 외세와의 동맹강화, 북한인권법, 5·24 조치 등을 문제 삼으면서 이명박 정부의 ‘비핵 개방 3000’과 무엇이 다른지를 묻고 있다. 북한은 당선인 측에게 이명박 정부의 대결정책과 대담하게 결별하고 진실로 남북관계 개선에 나설 의지가 있는지를 질문하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당선인의 대선공약과 북한의 공개질문장에 비춰볼 때 남북관계 조기 복원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남과 북에서 정권이 바뀌었다는 점은 새로운 관점에서 관계설정을 할 수 있는 전기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새 지도자들이 서로 유리한 고지에서 관계설정을 모색하면서 기싸움을 할 경우 남북관계 복원은 상당기간 지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권력기반이 취약한 김정은 체제가 남북 ‘적대적 의존관계’를 활용해서 내부 권력 공고화에 주력할 경우 남측 정부의 의지와 관계없이 남북관계 복원은 지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대적 의존(공생)관계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박정희 정권과 김일성 정권이 남북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유신체제와 유일체제를 구축하면서 외부 위협을 강조하고 내부 권력을 강화한데서 유래한 개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의 운명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박근혜 당선인과 김일성 주석의 손자 김정은 제1비서에 의해 결정되게 됐다. 박 당선인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대통령이란 업적 지위를 성취했다면, 김정은 제1비서는 수령의 세습에 따른 귀속 지위를 얻은 것이다. 박정희와 김일성이 분단체제를 활용해서 적대적 의존관계를 유지했다면, 박근혜와 김정은은 신뢰를 회복해서 상생과 공영의 상호의존관계로 남북관계의 질적 발전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냉전적인 남북분단체제를 지속하게 되면 남한은 ‘섬 아닌 섬’으로 고립되어 북방대륙으로의 진출이 늦어지고, 북한은 해양세력과의 관계정상화가 어려워진다는 점에서 남북관계 단절의 장기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남북관계는 5년간의 단절과 갈등 심화라는 후퇴를 경험했다. 또 다시 관계 설정에 많은 시간을 보낼 경우 임기에 쫓겨 의미 있는 관계진전을 이룰 수 없다.
북한붕괴론에 사로잡혀 시간이 우리 편이라던 이명박 정부 집권 기간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은 향상됐다. 새 정부의 시급한 과제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 능력이 향상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제재와 압력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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