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세례를 받은 젊은 예수는 광야로 나아가 40일 간 '단식'했다. 극도로 허기진 그에게 악마가 다가와 '세상의 모든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는 그 유혹을 물리친 뒤에야 광야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갓 아이 아버지가 된 왕자 싯달타는 그 자식을 보지도 않고 아버지의 성을 빠져나갔다. 마귀가 다가와 '7일만 참고 기다리면 온 세상의 부귀영화가 모두 네 것이 되리라'고 속삭였지만 그는 그 말을 무시하고 '고행'을 택했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는 견딜 수 없는 6년간의 처절한 고행을 끝낸 뒤 보리수 아래에서 득도하고 제자들을 모아 진리를 설파하기 시작했다.
시대와 무대는 다르지만 옛 성인들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단식'과 '고행' 뒤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정은 같다. 그들은 자기에게 약속된 '세상의 모든 영광과 부귀영화'를 거부하고 전 인류와 뭇 생명을 위해 자기 '몸'을 괴롭혔다.
현대인들도 '단식'과 '고행'을 한다. 다이어트와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그런데 이들이 자기 몸을 괴롭히는 것은 오직 자기 한 몸의 건강을 지키고 외양을 가꾸기 위해서다. 옛 성인들은 자기 몸을 괴롭혀 인류를 구원할 도(道)를 얻고자 했지만, 현대인들은 자기 한 몸을 괴롭혀 자기 한 몸만 구하고 꾸미려 한다. 현대인에게 '제 한 몸'은 옛 성인의 우주만큼 중요하다.
오늘날의 인류는 자기를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단정한다. 인류가 다른 어떤 '동물'에서 진화했다는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다른 동물과 자기를 구별하는 의식도 진화의 어느 단계에서 비로소 출현했을 것이다. 그 의식이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 즉 인문학적 사유의 기반이다.
인류사의 초기 단계에서, 인간은 자기가 갖지 못한 다른 동물들의 능력을 부러워했다. 독수리의 날개, 매의 발톱, 사자의 이빨, 소의 뿔 같은 것들을 인간의 몸에 붙여 놓고는 그것을 '신'이라 믿었다. 인류가 자신이 신을 닮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자기 의지에 따라 자연을 길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뒤였다. 그러나 그 뒤로도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다른 동물들과 자신을 확연히 구별하기 위해, 동물의 수준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경각심을 풀지 않았다. 인류는 '동물성'과 반대되는 곳에 '신성(神性)'을 놓았다. 인간을 신에게 인도하는 임무를 지닌 사제들은, '동물성'과 반대되는 '속성'을 갖춰야 했다. 다른 동물들도 다 하는 것들은, 그들에게 '금기'였다. 그들은 생식에 대한 욕망을 비롯해 모든 동물적 욕망을 억눌러야 했다. 보통 사람들도 가급적 사제들을 본 받아야 했다. 그것이 신에게 구원받는 길이었다. 많은 종교들이 보통 사람들에게도 일정 기간의 금욕 생활을 요구했다. 금욕은 인간이 신을 모방하는 행위이자 인간다움의 본령을 드러내는 실천이었다.
그런데 16세기 과학혁명과 뒤이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의 자기 인식에도 혁명적 변화가 생겼다. 인간은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 자기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미덕은 아니라는 생각이 금욕을 미덕으로 여긴 오래된 관념을 부수기 시작했다. 더구나 대량 생산 시스템은 극소수 특권층에게만 허용되었던 '욕망의 실현'을 대중화했다. 욕망을 표현하는 것, 욕망대로 실천하는 것이 죄라는 생각도 엷어졌다. 더불어 동물과 인간을 확연히 구분했던 경계선도 엷어졌다.
자기 욕망을 종교적 금제에서 해방시킨 결과, 현대인은 인류가 스스로 다른 동물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한 이래 가장 동물과 가깝게 되었다. 염치, 희생, 양보, 배려 등 인간의 '숭고함'을 구성하던 미덕들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고, 동물적 본능에만 충실한 '염치없는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솔직하고 진솔한 태도로 평가받는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종교가 있든 없든, 인류의 보편 종교가 가르쳐 온 것이 '인간다움'의 가치라는 사실을 한번쯤 곱씹어보는 날이었으면 한다. 자기를 희생해 인류를 구원하려 한 성스러운 존재를 기리면서, 자기 자신이 염치없는 욕망에 휘둘려 동물이 돼 버린 건 아닌지 성찰하는 날이었으면 한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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