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따스 아이들의 삶 보고 충격
알고도 모른척 한다는 건 사제 양심에 어긋난다고 생각
고민 끝 교구 옮겨 빈민사목 길로
검정고시 학당·유치원 운영… 가난 대물림 끊으려 교육에 주력
소액대출제도도 시행 절대 공짜로 주는 일은 없어
안식년·희년법은 보편복지 개념
천조각 하난 걸치고 떠난… 소유하지 않는 것이 예수의 삶
성탄일엔 그 삶을 성찰해야
25일은 기독교의 축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가 탄생한 날이다. 노동하는 목수를 이승의 아버지로 말구유에서 태어나 세상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2,000년의 역사를 내려오면서 하느님 왕국을 지배하는 왕이면서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벗으로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2012년 성탄절을 맞으면서 신학박사이면서 필리핀의 빈민촌으로 들어가 6년째 가난한 이들과 동고동락하는 김홍락(44 프란치스코) 신부를 만났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면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평생을 탁발로 연명하며 청빈의 미덕으로 가톨릭을 쇄신했는데 김 신부는 마침 그의 축일에 태어났다고. 아들과 의절한 성인의 아버지와 달리 김 신부의 아버지는 만석지기 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쓰고 전남지역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일찍 세상을 떠난 김동혁(1940~1995) 선생이다. 대를 이어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이들 부자에게 예수 탄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보따스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나보따스는 마닐라에서 북서쪽에서 7킬로 떨어진 작은 항구도시인데 80년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인구가 24만쯤 돼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사는 극빈층이 5만명, 빈곤층이 5만명이라 절반 정도가 빈곤층이에요. 그 중에 2만 5,000명 정도는 불법거주자고요. 제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으로 2004년부터 교부 전례학 박사학위를 필리핀에서 했어요. 원래는 광주신학대를 다녔는데 총장신부와 갈등을 빚으면서 중도에 그만 두었지요. 윤공희 주교님이 공부를 좋아하니 수도사제가 되라고 도미니크회에 추천서를 써주셨어요. 2007년 박사학위를 마칠 즈음인데 같은 시기 석사를 한 필리핀 신부가 생일이라고 집으로 초대를 했어요. 거기가 나보따스였어요. 다음날 아침 동네 구경을 시켜달라고 해서 판자촌을 보게 됐어요. 저도 대학 때 천주교도시빈민활동을 해서 가난한 동네에 익숙했지만 이런 데는 처음이었어요. 악취가 지독한데 오염된 물에서 아이들은 수영을 하고. 그대로 둔다면 저 아이들은 평생 저기를 못 벗어날 거란 생각을 하니까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내가 못 봤으면 모를까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도 보고도 모른 척 한다는 게 사제의 양심에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을 하다가 박사학위 후 자리잡은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광주에서 의사하는 동생한테 받은 80만원을 페소로 바꿔서 가방 두 개만 들고 나보따스로 들어왔어요."
-하루는 어떻게 보내나요?
"보통 다섯시 정도에 일어나요. 판자집 지붕이 양철 한겹이라 해만 뜨면 찜질방처럼 돼서요. 오전에는 서류처리 하고 오후에는 가정방문을 해요. 장학금을 받는 아이들 가정 중심으로 다니면서 아픈 사람은 간단한 치료도 하고 피임교육도 하고. 10대에 자녀 두 셋은 보통이고 서른 두 살에 애가 아홉인 사람도 있어요. 다섯 시에 직원들 다 퇴근하면 저녁 먹고 책좀 봐요. 전기가 잘 안 들어와서 광부들 랜턴 같은 거 쓰고 책 봐요. 어두운 데에서 책을 너무 봤더니 눈이 상했나 봐요. 아침에 깰 때마다 어지럽고 눈이 흐려서 정밀검진을 받으러 들어왔습니다."
-밥은 어떻게 먹어요?
"하루 두끼를 얻어 먹어요. 빈민촌에 세 끼 먹는 집이 없어요. 거리를 다니다가 밥을 제일 먼저 지은 집에서 먹어요. 푸석한 안남미로 지은 밥 반공기에 손가락 두 개 굵기의 생선 하나 굽거나 튀겨서 줘요. 처음에는 신부님한테 어떻게 이런 밥을 주냐고 안 주려고 했어요. 배고프니까 밥 달라고 자꾸 그랬어요. 이제는 지나가면 '파더 까민?(신부님, 밥 먹었어요?)그래요. 이 사람들이 주로 고기잡는 어선에서 일을 하는데 거기서 팔고 남아 버리는 생선을 먹어요. 바다로 던져버린 걸 주워오면 냄새도 지독하게 나요. 그렇다고 밥투정 할 수 있나요. 물 말아서 먹어요. 바닷가 도시인데도 인근 해역은 오염이 심해서 고기가 없어요. 처음 여기 들어올 때는 86킬로였는데 68킬로까지 내려간 적도 있어요. (웃음)"
-빈민사목에서도 특별히 주력하는 부분이 있나요?
"기본은 교육이에요. 아이들 하나라도 공부를 해서 직업을 갖게 되면 집안 전체가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나니까요. 2년제 무료유치원과 중고등과정 검정고시 학당을 운영하느라 전담 교사가 한명씩 있어요. 학교도 보내주고요. 128명에게 장학금을 줬는데 45명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애들도 있고요. 교대 보내서 선생된 애도 있어요. 저희는 빈민들이라고 절대로 공짜로 주지 않아요. 지역별로 동네 청소를 한다거나 저보다 어린 저학년 공부를 봐준다거나 부모들도 도박을 못하게 해요. 애들이 취업해서 7,000~8,000페소 정도 봉급을 받으면 200~300페소씩 우리한테 보내요. 목수들 하루 일당이 350페소니까 적지 않은 돈이지요.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이웃을 돌보는 거지요. 내년에는 학생 하나를 의대에도 보낼 생각이에요. 소액대출을 해서 150명 정도가 혜택을 입고 있어요. 먼저 돈을 꿔주는 게 아니고 5페소에서 10페소씩 매일 저축을 하게 해요, 180일이 되면 5% 이자를 쳐서 돌려줘요. 필리핀 은행들은 돈을 꿀 때 5000페소씩 담보를 걸어야 해요. 저축이자도 0.2%정도 밖에 안돼요. 우리는 25배로 이자를 주면서 저축예상액의 절반에서 돈을 꿔줘요. 그렇게 해서 3,000페소를 2년반째 갚고 있는 사람도 있어요. 소액대출 제도 덕분에 굶는 사람은 없어졌어요. 그 전에는 하루 못 벌면 하루 굶어야 하는 거였거든요. 2년반 전에 2,000여만원의 기부금이 들어와서 의료조합도 시도했어요. 1주에 20페소씩 석달만 돈을 내면 온가족이 조합원이 되어 병원비는 조합이 대신 내주고 천천히 갚을 수 있게 해주는 제도였는데 치료비는 한달에 몇 백만원씩 들어가고 들어오는 돈은 몇 만원씩이라 8개월만에 끝이 났어요."
-한때는 천막에서도 사셨다고요.
"천막촌을 강제철거한다고 해서 제가 가서 1년 8개월간 살았어요. 얘네는 철거를 하면 M16으로 무장한 군인이 한 트럭 와요. 전에는 무조건 때려부수고 살림살이 트럭에 싣고 가서 버리더니 제가 들어가면서부터 우리가 미리 텐트를 걷고 살림살이를 옮겨놓으면 철거반원들이 와서 (보고용) 사진을 찍은 다음에 다시 천막을 치는 걸 도와줘요. 매일 되풀이하는 거예요. 최종 철거가 있기 보름 전에 철거반대운동을 하던 빈민운동가가 피살당했어요. 아침에 주민들하고 커피를 마시는데 젊은이 두 사람이 오더니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서 네 발을 쏘고 가버렸어요. 필리핀은 아로요 정원 때 이미 정권에 반대하는 언론인이 200명이 죽었어요. 갖고 있던 트럭을 팔아서 3층짜리 합판 판자집을 만들었어요. 지금 저희 사무실이 있는 곳이자 철거민 13가구를 위해 방 하나씩을 주는 무허가 건물이에요. 나보따스를 떠나 시골에 땅이 마련된다면 못 옮겨온 11가구까지 포함해서 24가구가 협동농장을 운영해보고 싶어요. 제가 계속 못하더라도 빈민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살았습니까?
"도련님 소리 듣고 컸지요. 전남 영광군 대마면 원흥리에서 우리 땅을 안 거치면 지날 수가 없다고 하고 집안 쌀만 찧는 정미소가 따로 있을 정도였어요. 아버지는 60년대 초반에 한양대 공대 전기과를 졸업하고도 야학 하겠다고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1966년엔가 가난한 학생들을 공짜로 가르치는 정식 학교인 재건중고등학교를 세우셨어요. 학교를 운영해야 하니까 유산받은 땅을 팔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집 한 채만 남았어요. 전남가톨릭농민회 회장을 하시면서 함평 고구마 사건(고구마 수매를 늦춰 고구마를 썩게 한 농협에 농민들이 단합하여 이룬 피해보상투쟁)을 터뜨리셨고 광주항쟁 기간에는 시민위원으로 활동했어요. 1980년 12월에 광주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키셨지요. 점심에 잡혀간 분이 보름동안 소식을 몰랐어요. 연락이 와서 가보니 담당 검사가 재건중고등학교를 나왔어요. 판사를 설득해서 병보석으로 내보내달라고 했다고 해요. 병보석으로 나오시긴 했는데 일주일만에 형확정으로 다시 감옥으로 가셨어요. 학교 입학식이나 졸업식이면 중국집으로 짜장면 먹으러 가잖아요. 그런데 저는 광주교도소로 아버지 면회간 기억만 나요. 신학교 간다니까 당부가 세가지였어요. 본당 신자의 마지막 한 가정까지 차를 가지기 전에 차를 가지지 마라. 절대 돈문제 일으키지 마라. 본당 신자 중에 마지막 신자까지 골프를 즐기면 골프를 하라. 집안은 어머님(이정숙 74)이 영광군청에서 일하면서 꾸려갔는데 남편이 '빨갱이'이라고 사직 압력을 무지 많이 받으셨어요. 제가 나보따스로 들어간다니까 어머니가 1초도 망설임 없이 허락을 하면서 그래요. '누가 지 아비 아들 아니랄까봐.'"
-예수는 왜 왔을까요?
"예수가 태어나던 때 유대인 삶은 질곡이었어요. 로마로부터 점령을 당했는데 정치관료들과 결탁한 종교에 의해서 세금을 못 내서 땅을 빼앗기고 고리대금을 쓰다 보니까 평민들도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소작농이었던 사람이 대지주의 농장노예로 전락하는 수준이었거든요. 하느님이 그렇게 부르짖었던 안식년(7년마다 노예를 해방)이나 희년법(안식년이 7번째 되는 해에 모든 부채를 면제하고 노예를 해방)이 지금으로 말하면 보편복지 개념이거든요. 땅을 휴작하고 십일조를 거두면 10분의 1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써라. 종교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희년법조차 작동하지 않는 세상이었잖아요. 그렇게 희망이 없던 세상에서 예수가 와서 희망을 선포하지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희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 그게 예수탄생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성탄을 맞는 마음가짐은 남달라야겠네요.
"벌거벗은 아기로 와서 천조각 하나 걸치고 떠난 예수의 삶을 우리가 살고 있는지 매년 성찰해야 해요. 저희는 어떤 건물도 자산도 소유하지 않으려고 해요. 연말이 되면 연초에 줄 장학금을 빼고는 탈탈 털어서 이웃들에게 다 나눠줘요. 자산 0을 만들고 매년 새로 시작합니다. 내 것을 챙겨두면 거기에만 신경을 쓰게 되니까요. 올 초에 자매님 한 분이 3,000만원을 보냈어요. 신부님이 알아서 좋은 일에 쓰라길래 100만페소, 2830만원을 나환자 자녀를 위한 교육비로 기부했어요. 저희도 돈이 없지만 우리는 서로 돌볼 수 있어도 나환자 자녀는 우리가 돌볼 수 없잖아요."
-너무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견디십니까?
"제가 신학교를 나오고 수도회 들어가기 전에 대검찰청에서 7급 검찰수사관을 1년반 정도 했어요. 마약수사를 전담했는데 일제단속기간이면 잡혀온 사람들한테 미해결 사건을 다 뒤집어 씌워요. 수사가 끝나면 온갖 화려한 데에서 회식을 해요. 그때가 제 삶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이에요. 냄새나는 빈민촌에서 이번 달에는 애들 학비를 무사히 줄 수 있을까 직원들 월급은 챙겨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하느님이 왜 나를 이리로 이끄셨나 묻고 싶은 마음이 왜 안들겠어요. 그러나 잠들 때마다 영혼이 정말 행복해요."
서화숙 선임기자 hssu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