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시대 평균연령은 채 50세가 안 됐다. 그러므로 서른에 뜻을 세우고(而立), 마흔에 흔들리지 않으며(不惑), 쉰이면 세상사를 깨우친다(知天命)는 말은 현세와 맞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예전의 낮은 평균연령은 대개 높은 영ㆍ유아 사망률 때문이다. 어릴 때 홍역, 마마 등을 용케 다 이겨낸 이들은 그 시절에도 환갑, 진갑잔치 다 치렀다. 세상사를 나름의 눈으로 보게 하는 경험의 폭과 양은 오히려 지금의 같은 연령대가 더 풍부할 것이다.
■ 50대가 돌연 선거의 핵심변수로 부각되면서 온갖 담론의 표적이 돼 있다. 뜻밖의 '대접'에 뿌듯해하기보다는 거꾸로, 꽉 막히고 머리가 굳어버린 세대로 보일라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경이적인 투표율 90%보다 50대의 문재인 지지표가 그래도 40% 가까이 됐다는 통계를 들이밀기도 하고, 80년대 민주화 항쟁의 주류세대였음을 애써 강조하기도 한다. 또 10년 전에는 노무현 당선에 일조한 세대였음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 무성한 '50대 분석' 중에서 가장 큰 오류는 '박정희 향수'에 빠진 세대로 보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50대 대부분은 박정희 세대라기 보다는 오히려 80년대 초반 민주화 희망이 좌절돼가는 상황에 절망했던 전두환 세대에 가깝다. 50대 후반이라 해도 성장신화에 둔감해지고 유신의 폐해를 나날이 실감해가던 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다. 기억하건대, 그 때도 친여(親與) 성향의 젊은이는 생각 없는 이로 비웃음을 사던 분위기였다.
■ 그러므로 거쳐온 시대가 아니라 연령적 특성 자체로 50대를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세월의 숱한 경험 속에서 모가 깎여나간 '둥근 정서'가 그 것이다. 그들의 정서를 강퍅한 이념요인으로 설명하는 건 잘못이란 뜻이다. 이정희의 모진 언설에 대한 불쾌감을 반대선택의 요인으로 든 50대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나 저나 세대는 흐르는 것, 5년 10년 뒤면 지금 50대를 흘겨보던 세대가 또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은 정서로.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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