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람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맛있게 드시면 좋겠어요."
20일 오후 서울 남산 밑에 자리한 대한적십자사(한적)에 '특별한 손님'이 찾았다. 전남 신안의 작은 섬마을에서 새벽잠을 설쳐가며 천리 길을 달려온 북한이탈주민(탈북민) 이정옥(46ㆍ여)씨와 김진우(49)씨 부부다. 트럭을 몰아 배를 타고 다시 버스와 열차, 택시에 8시간 넘게 몸을 맡긴 터라 피곤할 법도 했지만, 그런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배추와 무, 고추, 마늘 등 직접 기른 농산물로 손수 담근 김치를 어려운 이웃에 전달할 생각에 소풍가는 유치원생 처럼 마음이 설레던 것이다. 무려 850포기, 170상자, 2.5톤에 달하는 김치다. 부부로부터 김치 기부를 받은 한적은 저소득층 이산가족들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멀리서 온 김치엔'통일김치'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씨는 이날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주위의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며 수줍어했다. 남편 김씨도 "예전부터 우리가 좋아서 조금씩 해오던 일인데 소문이 나서 일이 이렇게 커졌다"며 난처한 표정이었다.
2003년 1월 한국땅을 밟은 뒤 같은 해 영농인 김씨를 만나 단란한 가정을 꾸린 이씨는 이미 동네서도 '기부천사'로 소문나 있다. 독거 노인들에게는 물론 2007년부터 매년 지역사회 봉사단체의 도움으로 복지관 등 어려운 이웃들에게 김장김치를 돌리고 있다. 이씨는 "빌린 남의 땅이 대부분이지만 33만㎡(약 10만평)의 대규모 논밭을 일구는 남편 덕분에 이젠 남들에게 도움도 줄 수 있게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김치 담그는 날엔 동네 사람들은 물론 인근지역 탈북민 10여명도 손을 보탰는데 우리만 이렇게 나와서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른다"고도 했다.
이씨 부부가 큰 마음 먹고 서울길에 오른 이유는 또 있다. "탈북민 중에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방법을 몰라 주저하는 이들에게 우리 이야기가 도움이 됐으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이씨) 탈북민 사회에서도 나눔과 배려의 문화가 확산되기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이씨는 이어 "탈북민들의 사회봉사, 기부활동이 활발해지면 사회의 싸늘한 시선도 좀 줄어들지 않겠느냐"며 "앞으로도 꾸준히 기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적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2만3,000여명의 탈북민 중 이씨처럼 기부에 뛰어든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날 김치를 서울로 실어 올린 트럭을 제공한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관계자는 "탈북민들이 여러 분야에서 적응하고 있지만 이씨는 영농으로 잘 정착한 대표적인 사례"라며 "한국사회에 안정적인 정착을 바라는 많은 탈북민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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