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검찰과 법원에게는 실체적 사실의 규명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목적은 단 하나, 나를 범인으로 만들고 싶어했을 뿐이다. 긴 재심 개시 과정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나도 병을 얻었다. 그리고 참으로 당황스럽고 처참한 기분으로 지난 10월 대법원 (재심 개시) 결정문을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재심의 기회를 열어준 법원에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것인지, 과연 의례적이나마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20년 만에 다시 법정에 선 '유서 대필 사건'의 강기훈(48)씨의 표정은 감격스럽다기보다, 어둡고 낯설어 보였다. 그는 재심 개시 결정에 오랜 시간을 끌었던 법원에 대해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검찰 수사 과정을 돌이키는 대목에서는 감정이 격앙된 듯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강씨는 지난 5월 간암 수술을 받고 현재 투병 중이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권기훈) 심리로 20일 열린 강씨에 대한 재심 첫 공판에서도 검찰과 강씨 측은 '김기설씨 유서의 필적과 강씨의 필적이 다르다'고 판단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감정 결과를 재판 증거로 채택할지를 두고 물러섬 없는 공방을 벌였다.
강씨의 변호인 측은 "검찰이 유서 대필의 증거로 내놓은 직접 증거는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감정실 명의로 된 필적 감정 결과인데, 진실화해위가 국과수 및 사설 감정기관에 재의뢰해 조사한 결과 다른 결론이 나왔으므로 재심 재판부는 이를 토대로 유무죄를 가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검찰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면서도 '진실화해위의 감정 결과를 명백한 무죄의 증거로는 볼 수 없다'고 한 대법원 결정을 인용해 "향후 공판에서는 대법원 결정 취지대로 국과수 직원의 위증 관련 부분만 다뤄야 한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변호인 측은 "대법원 결정은 진실화해위 감정 결과를 '새로운 증거'로 분명히 인정했으며,'무죄의 명백한 증거'인지 여부에 대해서만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따라서 당연히 새로운 증거로 채택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 공판은 내년 1월 31일 열린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씨 유서 대필 사건은 1991년 5월 김기설(당시 25세)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이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하자 검찰이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씨가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한 사건으로, 강씨는 1992년 7월 징역 3년 확정 판결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했다.
강씨는 2008년 1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법이 2009년 9월 재심 결정을 내렸으나 검찰이 재항고, 대법원은 4년 9개월 만인 지난 10월 "사건 당시 국과수 소속 문서감정인들의 공동 심의에 관한 증언 중 일부가 허위로 보여 재심 사유가 인정된다"며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은 "진실화해위의 감정 결과를 (사건 당시 검찰이 유죄 증거로 채택됐던) 국과수 감정 결과보다 현저히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여전히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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