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았다. 숱한 반대 이유 가운데 하나만 꼽는다면, 민주주의가 뒷걸음치고 언론자유가 짓밟힌 지난 5년간의 서글픈 역사가 되풀이 되리란 우려가 컸다. 반대편에 섰던 사람의 속 좁은 기우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걱정을 거두기 어렵다. 대선 기간 내내 이념적 편가르기에 앞장서며 보수층 결집에 큰 몫을 했던 한 원로 논객은 벌써부터 "선거의 여세를 몰아 종북좌익들을 정계, 관가, 언론계에서 반드시 추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언론까지 싸잡아 '깽판 난동세력'으로 모는 이 논객의 고함에서, TV토론 당시 합법 노조인 전교조를 들먹이며 구시대적 색깔론으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공격하던 박 당선인의 모습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예상과 기대를 뒤엎은 대선 결과로 충격에 빠진 문 후보 지지자들 사이에선 "이 모든 것이 정권에 장악된 언론의 편파보도 탓"이란 탄식이 나오고 있다. 박 당선인에게 표를 준 과반의 유권자들을 '거짓정보에 속은 우중(愚衆)'으로 폄하해 버리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언론, 특히 방송사들의 편파보도가 주로 방송을 통해 정보를 얻는 50, 60대 이상 유권자들의 선택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지난 5년간 낙하산 사장 취임에 반대하거나 공정성 훼손에 항의하며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언론인은 MBC 9명, YTN 6명, 국민일보 3명, 부산일보 2명 등 20명에 달한다. 정직, 감봉 등 징계를 받은 이들까지 합하면 450여명을 헤아린다. 이중 277명이 MBC 소속이다.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170일간 파업을 벌였던 기자, PD, 아나운서 등은 무더기로 징계를 받고 본업과 상관없는 부서로 내쳐지거나 이른바 '신천교육대'에서 수개월째 정신수양 교육을 받고 있고, 그 빈 자리를 시용ㆍ경력직 직원들이 채웠다. 이런 환경에서 대선 관련 보도가 공정하게 이뤄졌다고 주장한다면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실제 대선 기간 쏟아진 편파보도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MBC는 새누리당 관련자의 제보에만 기대 무리하게 안철수 후보의 박사논문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가 선거방송심의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또 교묘한 편집으로 새누리당의 '노무현 전 대통령 NLL 포기발언'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MBC뿐 아니라 KBS, SBS도 방송 분량이나 유세 청중을 비추는 카메라 각도를 달리해 박 당선자에게 유리한 보도를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연합뉴스는 박 당선자를 다룬 미 시사주간 타임 아시아판의 커버스토리 제목 'Strongman(독재자)의 딸'을 '실력자의 딸'로 오역했다가 빈축을 샀고, 노조는 불공정 보도를 주도한 정치부장에 대한 불신임 건의안을 통과시켰다.
박 당선인은 지난 1년간 언론 현장에서 벌어진 이 같은 일들에 대해 침묵했다. 공영방송지배구조 개선을 공약에 포함했다지만 구체안을 내놓지 않아 실천 의지를 의심하게 했다. 사실 KBS와 MBC, YTN, 연합뉴스의 동시파업과 뒤이은 대량 징계 사태에 대해 그가 관심을 갖고 해결 의지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방안을 찾을 수 있었다. 일각에서는 유례없는 언론사 동시파업 와중에 치러진 4ㆍ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압승을 거둔 점 등을 들어 박 당선자의 침묵이 '미필적 고의'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박 당선인은 20일 기자회견에서 국정의 주요 방향으로 화해와 대탕평, 국민대통합 등을 제시했다. 대선 기간에도 입만 열면 강조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때때로 그와 측근들의 몸은 그 입을 따르지 않았다. 화해와 대통합을 이루려면 소통이 전제돼야 하고,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 언론이 바로 서려면 먼저 이 나라를 언론자유 후진국으로 전락시킨 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해직 언론인들에게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 "제가 그래서 대통령이 되려고 한 거 아니에요?" 박 당선인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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