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완 소설가
지난하기만 했던 대선이 끝났다. 그런데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도배하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들이 이루어졌을까? 현재의 나는 모른다. 그런데 독자들이 이 칼럼을 읽을 때쯤이면 아마도 독자들은 새로운 대통령이 누군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칼럼이 신문에 실리는 시점인 시점에서 보면 지금 필자가 앉아 있는 시간은 과거고 지금의 시점에서 보자면 아직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은 미래이다. 이게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이 글을 읽게 될 나의 거리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 이 시점이 가장 불확실하다. 단 몇 시간 뒤의 일도 예측할 수 없으며 몇 시간 전의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
지금 20대와 30대의 상황이 그렇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돌발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정치, 경제, 생활 전반에서 툭툭 솟아오른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울해 질 수 밖에 없는 질문이다. 방법이 없을까? 있다, 분명히 있다. 지겹게 들었던 말,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다”라는 말을 상기하면 된다. 2030세대의 인구비율은 전체인구의 38%나 된다. 한 국가의 정책을 흔들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서로 ‘친애’하며 소통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애를 삶의 필수요소로 보고 있다. 인간이 더 나은 인간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반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주석에 있는 친애의 번역의도를 보면 영어로 번역되는 friendship 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품성과 감성을 가진 존재들이 맺는 관계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의 대상은 서로 상호작용을 원칙으로 한다. 친애의 기본 원리는 상호간의 즐거움, 유익함,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탁월함이 교류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모두 상호교류에 의해 맺어지는 관계인데 그렇지 않으면, 혹은 한쪽에서 교류를 끊으면 이 친애는 곧 파기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친애는 상당히 합리적이다. 친애의 구체적인 관계를 제시하면서 그는 친애라는 단어로 모든 인간의 관계를 묶었다. 이성적이며 지극히 모든 세대를 한꺼번에 포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는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살아가는 한 언제나 통용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개념 안에서 서로 연대해야 한다. 한 사람의 선동이 아닌, 여론의 몰이가 아닌 세대 간의 통합을 위해서 서로 친애해야 한다. 더 이상 기득권의 이념적 잣대가 우리 삶의 방향에 영향을 주는 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계는 우리가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연대한 권리로 기득권의 잣대를 부러뜨릴 수 있다. 어떠한 거짓된 경보도 없이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꾸릴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빼어난 한두 명의 위인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다수의 사람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비록 현재 소수 기득권자에게 억압될 수 있겠지만 국가는 국민이라는 다수의 사람들이 구성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민의 의지대로 국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참된 국가의 모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2030세대들은 우리 사회에 정면으로 나서서 비난하거나 직접 충돌하기를 꺼리게 되었다. 기득권들이 만들어준 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목소리를 내야 한다. 금기를 깨야 그 동안 견고히 구축해온 우리 사회의 기득권 카르텔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2030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도서관 구석에 앉아 꿈만 꾸고 있었다. 경쟁이라는 틀 안에서 좌절하는 법만 배웠을 뿐, 경쟁하는 방법을, 경쟁자체를 부정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느덧 우리는 기득권들이 만들어놓은 창의성에 갇혀 살고 있었다. 먹고 살고 싶으면 발설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라는 감옥 속에 살았다.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대한민국에 금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모순된 것이다.
2030 우리는 내일 펼쳐질 새 세상에서 서로 친애하고 소통해 새로운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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