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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걸어온 길

입력
2012.12.19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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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걸어온 길

박근혜 제18대 대통령 당선인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자 부녀(父女)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쓰게 됐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 퍼스트레이디 대리로 청와대 안살림을 책임지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청와대에서 나온 지 34년 만에 청와대에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딸’이 아닌 ‘대통령 박근혜’로 청와대에 입성하는 박 당선인의 인생에는 현대사의 빛과 그림자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대통령의 딸 박근혜

박 당선인은 1952년 2월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육군 소령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교사 출신 육영수 여사의 1남(지만) 2녀(근혜ㆍ근령) 중 첫째였다.

평범했던 박 당선인의 유년시절은 박 전 대통령이 61년 5ㆍ16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서 180도 바뀌었다. 63년 2월 박 전 대통령의 제5대 대통령 취임으로 박 당선인은 초등학생 시절 청와대로 들어갔다.

학창시절 박 당선인은 조용한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성심여중ㆍ고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고, 서강대 전자공학과(70학번)를 이공학부 수석으로 졸업했다. 박 당선인은 자서전에 “어머니는 사학과 진학을 바라셨지만, 수출을 늘리려면 전자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이공계를 지원했다”고 썼다.

박 당선인의 대학 생활은 여느 학생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팅도 연애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올 초 SBS ‘힐링캠프’에 출연해 “대학 때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74년 2월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같은 해 8ㆍ15 경축행사장에서 육 여사가 재일조총련 출신 문세광의 총탄에 목숨을 잃으면서 꿈을 접고 귀국해야 했다.

그는 저서에서 “빨리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영문도 모른 채 공항에 갔다가 거기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난 신문을 봤다. 순간 심장이 잘려 나가는 듯 했다”고 술회했다. 이후 박 당선인은 22세의 나이로 유신 정권의 퍼스트레이디 대리가 돼 외국 사절 영접과 소외계층 봉사활동 등 대외 업무를 수행하면서 아버지의 국정 운영을 가까이서 지켜 보았다.

5년 뒤인 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마저 김재규가 쓴 총에 맞아 서거했다. 27일 새벽 당시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비보를 듣자마자 박 당선인이 “전방은 괜찮습니까?”라고 물은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청와대에서 9일 간의 국상(國喪)을 치른 뒤 박 당선인은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그는 언론인터뷰 등에서 “그 때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서 흘릴 눈물이 별로 없다. 사람들이 TV 드라마를 보다가 울면 ‘저 정도로 눈물이 나오나’ 싶을 때가 있다”고도 했다.

정치인 박근혜로 홀로 서기

박 당선인이 반강제로 은둔하며 산 것도 이 때부터 18년간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가까웠던 인사들이 박정희 체제를 폄하하거나 자신을 외면하는 것을 보며 큰 상처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근령, 지만씨의 방황도 박 당선인을 힘들게 했다.

박 당선인은 종교서적ㆍ고전 읽기와 중국어ㆍ영어 공부, 문화유산 답사, 단전호흡 등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가 수필가로 등단해 한국문인협회 회원이 된 것도 이 때다. 80년대 초엔 한 신학대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박 당선인은 육영재단 이사장ㆍ영남대 재단 이사장 취임(82년) 박정희기념사업회 발족(88년) 정수장학회 이사장 취임(94년) 등을 거치며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썼다. 90년엔 동생 근령씨가 문제를 제기해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넘겨주는 등 형제간 분란을 겪는 아픔도 감수해야 했다.

박 당선인은 97년 말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원 활동을 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였다. 이어 98년 4월 대구 달성의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서 당선됐고, 올 11월 국회의원을 사퇴할 때까지 내리 5선을 했다. 그는 보궐선거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위기에 빠진 국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출마 이유를 밝혔다.

박 당선인은 당 부총재 시절인 2002년 2월 이 총재가 자신의 당 개혁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어 이 총재가 개혁안을 상당 부분 수용하자 9개월 만에 복당했다. 2002년 5월엔 ‘유럽-코리아 재단’ 이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가진 뒤 돌아왔다.

박 당선인이 명실상부한 대선 주자로 발돋움한 것은 2004년 17대 총선 때다. 그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 파문(차떼기 파문)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휘청거리던 한나라당의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 설치, 천안 연수원 매각 등 승부수를 띄운 끝에 121석을 얻어 개헌 저지선을 확보했다.

이후 대표 재임 2년3개월 간 지방선거와 각종 재ㆍ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의 완승을 거두었다. 그에게 ‘선거의 여왕’, ‘박다르크’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박 당선인은 2006년 지방선거 지원 유세에서 괴한이 휘두른 칼에 오른쪽 얼굴을 11㎝ 베이는 테러를 당했다. 박 당선인은 수술이 끝나자마자“대전은요?”라고 접전지 판세부터 챙겼고,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거 분위기가 바뀌어 결국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압승으로 이어졌다.

박 당선인은 2007년 당내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이명박 대통령에 패했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 맞이한 첫 패배였다. 이후 지난 5년 간 현정부와 거리를 둔 채 비주류 행보를 했지만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에서는 1위 자리를 계속 지켰다.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의 승복 연설 및 2009, 2010년 정부의 세종시 원안 수정 움직임 저지, ‘수첩 공주’라는 별명 등이 상징하는 원칙과 신뢰의 브랜드, 그리고 아버지의 후광에서 비롯된 대중적 인기 등이 ‘박근혜 대세론’을 떠받치는 힘이 됐다.

연말ㆍ연초 이후 박 당선인에겐 서울시장 재선거 패배로 인한 여권 분열, 스스로 초래한 과거사 인식ㆍ불통 논란, 측근들의 금품 수수 의혹들,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의 출마로 인한 대세론 붕괴 등 수 차례 고비가 닥쳤다.

박 당선인은 이 모든 위기들을 넘기고 끝내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올랐다. 대통령의 딸, 퍼스트레이디 대리였던 그는 이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으로 ‘박근혜 시대’를 열게 됐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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