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축되는 영역은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게 기업일 것이다. 한 정권에서 잘 나가던 기업이 다른 정권에선 죽을 쑤는 일이 허다했다. 기업의 숨통을 조이는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세무조사나 오너 일가의 비자금 수사, 뭐 대충 이런 걸로 귀착됐다. 기업이야 늘상 돈을 만지는 곳이고, 장사 하려면 아무래도 정치권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에 정권에 따라 부침이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학문의 전당 대학은 무슨 연유로 정권 탄생에 유독 민감할까.
장충식 단국대 명예총장이 지난해 발간한 자서전 엔 정권과 대학이 종속 관계로 표현돼 있다. 정권은 부동의 갑(甲)이고, 대학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을(乙)일 뿐이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뒤 단국대를 집중적으로 손봤다고 술회했다. 여러 까닭이 부연돼 있지만 핵심은 한 가지, YS의 영원한 정치 라이벌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장 명예총장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회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정적 간 갈등에 대학이 희생된 것 아닌가.
한번 흠집 난 대학이 정상화하는 건 쉽지 않다. 단국대가 그랬다. 관선 이사가 나오고 부도 위기까지 간 끝에 서울 본교를 경기 지역으로 옮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겨우 한 숨을 돌리는 데 무려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누가 이걸 보상할까.
단국대 사례는 어쩌면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정권과 정부는 부인하겠지만 사실인데 어쩌겠나. 참여 정부 때 그랬고, 이명박 정부도 대학을 도마에 올려놓고 흔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참여정부 때는 국립대인 서울대가 타깃이었다. 2005년 서울대 입시 개혁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노무현 대통령과 정운찬 당시 서울대 총장 간의 살벌한 기싸움은 아직도 한편의 영화처럼 각인돼 있다. 그때 사립대는 반사이익을 누렸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당한 측면이 있다. 입시 개혁을 위시한 대학 구조조정과 사학법 개정을 밀어붙이려는 정부에 사립대는 완강하게 저항했다. 사학의 자율성 침해에 대한 반발이었다.
MB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대학 프렌들리'을 내세웠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적법성 및 표적 논란이 거셌던 무차별 사학 감사와 재정지원을 무기로 한 대학 개혁은 'MB식 대학 길들이기'의 백미였다. 이 과정에서 정권의 눈밖에 난 일부 대학은 폐교 조치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모든 대학들이 새 집권 세력의 등장과 함께 '잃어버린 5년'을 똑같이 경험했던 건 아니다. 특정 정권 출범이 약이 됐던 대학들도 꽤 된다. 수혜를 받았다는 얘기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정부 돈을 받아내거나, 툭하면 총장이 청와대로 들어가는 대학들이 있었다. MB정부 들어선 갑자기 교세가 커진 몇몇 대학이 보인다. 대학 살림살이가 확 핀 덕이겠지만, 이게 거저 이뤄졌겠는가. 조금 깊게 들여다보면 재정 확대에 엄청난 보탬이 될 만한 '사건', 이를테면 수익사업과 관련한 각종 인허가가 대학 재단에 부여되는 식이었다.
오늘은 대선 투표가 있는 날이다. 누군가 정권을 잡겠지만 대학 주변은 또 술렁인다.'살생부'를 언급하는 기류도 감지된다.'MB 정부때 고속 성장한 대학은 불편해질 것이다''대선 캠프 참여 교수들이 많은 대학들은 불이익 당할 것이다''이사장이나 총장이 구 정권과 친했던 대학은 위험하다'따위의 잡설들이 대학 주변을 떠돌아 다닌다.
대학이 정권 눈치를 봐야 하는 건 국가적으로 불행이다. 자율성이 담보되지 않은 대학은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다.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대학은 항상성을 유지해야 하고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게 자기 길을 가면 될 일이지만, 현실이 안 그렇다는 게 문제다. 털면 뭐든 나올 것 같은 대학을 청와대의 새 주인은 가만 놔둘 것 같지 않다. 질 관리, 질 높은 교육 운운하면서 대학을 손아귀에 넣거나, 대선 때 밉보인 곳은 제재할 공산이 있다. 언제까지 한국의 대학은 정권에 끌려다녀야 하나.
김진각 여론독자부장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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