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에 사는 김모(70) 할머니는 5년 전부터 치매를 앓는 남편 정모(80)씨를 간병하며 지극 정성으로 보살펴 왔다. 하지만 김 할머니가 1년 전부터 다리가 아파 병원 치료를 받으러 자주 외출하면서 정씨는 틈만 나면 김 할머니를 괴롭혔다. 정씨는 "어느 놈을 만나고 돌아다니느냐", "남자를 만나고 얼마를 받은 거냐" 등의 말을 하며 김씨를 의심했다. 또 입에 담지 못할 욕설도 내뱉으며 괴롭힘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남편이었기에 꾹 참아왔던 김 할머니도 인내심이 한계점에 다다랐다. 특히 올 추석 연휴 모처럼 자녀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남편이 "너희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돌아다닌다"고 하자 크게 싸우기도 했다.
지난달 10일 밤 정씨가 외출했다 귀가한 김 할머니에게 또 심한 욕설을 퍼붓자, 김 할머니는 면장갑을 낀 채 집에 있던 변압기로 정씨의 머리를 수 차례 내리 찍었다. 김 할머니는 남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큰아들에게 전화를 걸어"집에 강도가 들어 아버지가 많이 다쳤다"고 거짓말했다. 병원으로 후송된 정씨는 피를 많이 흘렸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경찰은 김 할머니가 얘기한 인상착의의 용의자가 주변 CCTV에 등장하지 않고, 강도가 김 할머니 입에 붙였다는 테이프가 깔끔하게 잘린 점 등을 수상히 여겨 추궁한 끝에 김 할머니로부터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는 자백을 받았다. 경찰은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이 선처를 호소하는 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를 기각했다. 경찰은 16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 관계자는 "남편을 데리고 다니며 보살펴 왔던 김 할머니가 입에 담기 어려운 심한 말을 계속 들으니까 마음의 상처가 상당히 컸다고 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6월 전북 정읍에서 치매 증상이 있는 60대 남성이 부부싸움 뒤 아내를 살인하는 등 올 들어서만 치매 관련 살인·자살 사건이 7건 발생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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