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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김근태치유센터 설립 준비하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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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김근태치유센터 설립 준비하는 이화영 인권의학연구소장

입력
2012.12.16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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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문가서 인권의학 전도사로

건강 위협하는 사회적 고통 관심

미국·유럽 고문치유 의사들 알게돼

인권의학연구소 설립

용산참사 피해자 심리치료 계기

개인 문제 치부하는 피해자들에 집단치유는 반드시 필요해

국가적 지원 필요하지만

율릉도간첩조작 등 알려지지 않아 피해자 수 집계도 제대로 안돼

사회적 문제로 인식 필요

치유 의무 있다는 인식 공유해야

떵떵거리고 사는 가해자 보며 5·18 피해자 증상 재발하기도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민간치유센터인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생긴다. 이 센터를 설립하기 위한 준비모임이 10일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남영동 1985'라는 영화로 재연되고 있지만 김근태(1947~2011) 전 의원은 전두환 정권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보이는 파킨슨병에 시달리다가 불과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서 그는 울컥 성내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고문의 후유증을 앓는다는 생각을 주변에서 하지 못했고 되려 그에게 젊을 때의 활기로 민주화 운동을 해주길 심지어는 고문가해자인 이근안을 용서하기까지 바랐다. 그 이근안은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최근 책을 내고 변명 아닌 변명을 일삼고 있다. 이렇게 가치전도된 세상을 참아내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그 분노를 사회정의를 바로잡는 일에, 고문피해자를 위한 치유를 돕는 일에 써달라고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설립준비에 앞장선 이화영(53 내과전문의) 인권의학연구소 소장은 말한다.

-인권의학이 뭔가요?

"과거에는 건강을 위협하는 고통의 원인으로 질병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의료인들은 어떻게 하면 질병을 없앨까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하버드대 보건대학원을 중심으로 사회적인 고통을 봐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됐습니다. 건강권은 인간이 누구나 누려야 할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차별 가난 폭력 이 세가지가 건강을 위협하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차별과 가난 폭력에도 의료인들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인권의학입니다."

-원래는 내과전문의로 암전문가였다는데 어떻게 인권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제가 77학번인데 그때는 대학생이 전체의 5%쯤 되었어요. 그래서 선배들이 '대학생은 95%에게 빚진 자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를 강조했어요. 연세대 의대 암센터에서 유방암을 담당했는데 2000년에 미국 국립보건원 산하 국립암센터로 연구를 하러 갔어요. 2001년에 9.11이 일어났지요. 이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이 터지는 과정에서 보니까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의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를 방송이 계속 틀어놓아요. 인권문제가 전쟁을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라크 치고 나서는 북한인권상황을 계속 내보내는 거에요. 북한을 쳐도 미국인들은 정의로운 전쟁을 한다 믿겠구나 싶어서 조지메이슨대 국제분쟁분석해결학 연구소에 들어갔어요. 2003년이었어요. 면접하는 교수가 너 의산데 테러리스트 하려고 이거 하느냐고 묻더라고요. 알고보니 (팔레스타인 투쟁단체) 하마스의 지도자가 소아과 의사에요.(웃음) 분쟁지역에 가서 한달간 실습을 하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에 갔더니 '인권을 위한 의사회'가 있어요. 팔레스타인 정치범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고문을 폭로하고 치료도 하고. 의료가 분쟁지역에서 화해의 도구가 될 수 있구나 깨달았지요. 1974년에 덴마크에서 칠레 난민들의 망명을 승인하기 위해 고문진단서를 써주던 국제 엠네스티의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서 고문피해적응센터 RCT(rehabilitation center for torture)를 1982년에 만들어요. 이게 IRCT라는 국제기구로 커졌고요. 70여개국이 가입해서 150여개 단체가 가입했어요. 미국에서도 1985년에 고문피해자센터 CVT(center for victims of torture)가 생겼고 1998년에는 고문피해자구제법도 만들었어요. 유럽이나 미국이 모두 외국에서 들어온 망명자를 치유하려고 이렇게 힘을 들이는데 정작 우리나라는 국가폭력이 엄청나게 일어났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데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거든요. 의료계에서도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 자체가 관심거리가 아니었어요. 한국에 가서 의대생들한테라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세대 의대에서 '인권의학' 강의를 개설해줘서 2007년 가을에 귀국을 했어요."

-본격적으로 연구소까지 만든 이유가 있어요?

"2009년말에 용산참사 피해자를 돌보던 신부님이 그러세요. 아이들이 천막에서 학교를 다니는데 심리치료가 필요할 것 같으니 맡으라고. 정신과 의사들과 가보니 아이들뿐 아니라 철거민, 유족들, 올라갔다가 살아온 사람들 간의 갈등이 매우 심했어요. 정신과 의사 네 분이 개인치유를 했어요. 이런 분들을 계속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2010년 10월에 집단치유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울릉도 조작간첩사건, 서울도시철도 해고근로자, 70~80년대 노동운동 국가폭력 피해자, 학림사건 피해자 집단치유를 했습니다."

-집단치유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속에 담긴 것을 끌어내서 재조립을 하려면 개인 치유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집단치유를 하기 전에 이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합니다. 고문 피해를 당하신 분들이 대부분 개인의 잘못으로 이 문제를 담아두고 계세요. 당시 벌어졌던 일에 대해서도 내가 부주의했다, 그 후에 고문 후유증으로 생기는 분노나 우울증, 대인기피에 대해서도 내가 성격이 이상하다 그러면서 사람을 피하고 잘 믿지를 못해요. 집단치유를 하면 이게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구나, 당시 정치적인 상황에서 내게 벌어진 일이구나, 그런 일을 겪으면 누구나 나와 같이 될 수 있구나를 받아들이게 돼요."

-치유의 단계가 있습니까?

"무력감 상실감 분노, 자기자존감이 낮아지는 것들이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걸 일러드려요. 가해자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내 인생을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뿐이다. 그건 내 인생을 안 망가뜨릴 수 있는 것도 나 자신 뿐이라는 거지요. 아내나 아이처럼 가장 만만한 상대한테로 분노가 가는 걸 막는 분노조절을 가르치기도 하고요. 무력감은 알코올 중독이나 자살하고도 연관되고요. 고문은 영구적인 후유증을 남겨요. 치과에 가서 얼굴에 포를 씌우면 물고문 받던 기억이 떠올라서 치과도 잘 못가지요. 심전도 검사를 받으면 전기고문이 그대로 떠올라 죽을 것 같다고 하고요. 홍성담 화백은 부인이 정신과 의사이고 치유의 도구인 미술을 갖고 있는데도 담에 작은 가방과 의자 운동화가 놓여있지 않으면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해요. 한명숙 전 총리도 기록을 못 남긴대요. 연필로 쓰고 반드시 지워야 마음이 놓인대요. 높은 지위에 올라 보상을 받은 사람도 이러니 평생 쫓겨 다니고 숨어살고 가난 때문에 자녀들 교육도 못 시키고 치료도 못 받은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인권클리닉에는 정신과의사, 심리상담가, 내과의사 또는 가정의학전문의를 꼭 필요로 한다고 써놓았던데요.

"심리적인 후유증 뿐 아니라 신체적인 후유증이 있어요. 가장 많은 것은 근골격계 질환이에요. 각목고문을 당했으면 관절이나 인대가 손상을 입거든요. 스트레스나 알코올중독 때문에 소화기계 질환이 있어요. 물고문을 받아서 폐에 물이 들어가면 만성 폐질환이 생기고요. 그래서 심리치료와 더불어 내과의사 재활의사들이 필요합니다. 고문은 사람 손으로 당한 것이기 대문에 사람 손이 치료할 수도 있는 도구라는 점에서 마사지 치료를 많이 하지요."

-국가폭력 피해자는 얼마나 됩니까?

"정확한 숫자는 없고요. 저희 연구소가 90년대 중반부터 국가기관에 의해서 조사된 숫자를 내보았어요. 광주민주화 거창 제주 삼청교육대 쭉 조사를 해봤더니 30만명이 넘고요. 국정원이나 경찰조사에서는 건수로만 나오는데 8,560건인데 사람은 한명부터 수천명까지니까 수십만명이라고 보는 거지요. 30만명도 신고된 사람일 뿐 과거사 위원회에 들어온 걸 보면 재일교포 사건만 해도 200명 중에 20명 정도만 신고가 되어서 재심을 받았어요. 저희가 집단치유를 한 간첩조작한 사건인 울릉도 사건도 47명이 잡혀서 3명은 사형선고까지 받은 사건인데 지금까지 알려지지도 않았거든요."

-울릉도 사건은 기자인 저조차도 처음 들어본 듯하네요.

"1974년 인혁당 사건과 같은 해에 일어났어요.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사망하면서 그 책임을 지고 중앙정보부 차철권이라는 사람이 좌천이 돼요. 그가 전주에서 군대 후배를 만나서 그의 자형이 일본서 성공한 사업가라는 사실을 알고는 조총련과의 연관 관계를 떠올리고 무차별적으로 엮어서 전주와 울릉도 지역의 47명을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에요. 이 사건으로 차철권은 영전을 하고 승승장구를 했어요.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 중에 3명이 사형을 당했고요. 대부분 십여년의 형기를 마치고 나오셨지요. 이성희선생은 전북대 교무처장으로 총장 물망에 올랐는데 1960년대에 도쿄대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는 북한에 가서 1주일을 보낸 것이 문제가 된 것이지요. 당시 김일 부주석을 만나 간첩 보내지 말라고 설득했다니 낭만적인 통일론자였던 거지요. 이 부부는 17년 형을 살고 나와서 전주를 떠나 강원도 인제에서 살다가 2008년에야 재심 신청을 하면서 이 사건이 알려졌어요. 다른 분들도 모두 숨어살고 연락도 끊고 살고 하다가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청구에 참고인으로 나오셨다가 사건이 밝혀지게 됐고요. 남편과 오빠가 연루된 분은 불고지죄로 잡아가서 10년을 살았어요. 아버지는 사형이고 엄마는 감옥에 가니까 중학교 2학년인 맏딸이 동생 셋?데리고 대구로 나와서 공장엘 다니면서 동생을 키웠어요. 재일교포들은 200명 정도가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있는데 재일교포가 한국말을 잘 못하잖아요. 잡아가도 항의할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맘대로 꾸며댄 거에요. 부산대 철학과에 유학왔다가 82년에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주모자가 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에는 전두환 찬양연설을 하고 다녔다고 해서 일본 교포사회와 완전히 단절된 분이 있어요. 진실화해위에서 편지 보내면 돌려보내고 사람들이 찾아가면 문도 안열어주고. 그런데 이 분이 주모자라 이 분이 재심을 청구하거나 증언대에 서야 많은 사람의 문제가 풀리거든요. 몇 분이 무죄를 받으면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분 방에서 나오는 비명 소리는 짐승의 소리였다는 거예요. 성고문도 당했다, 믿을 수 없는 모든 고문을 당했다. 겨우 만나서 인권변호사가 이 분 이야기를 듣는데 이런 식이래요. '고문은 별로 당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만진 건 사랑하는 사람이 만지는 건 아니었어요.' 너무나 고통스런 기억이기 때문에 두뇌가 완전히 조각조각나서 해리가 일어난 거예요. 일본말도 한국말도 잘하는 교포를 잡아서는 2년동안 고문 현장에서 그걸 통역하라 시키기도 했어요."

-국가에서 나서야 할 일 같은데요.

"12월 10일에 인재근의원이 '고문방지와 고문피해자 보상 구제법안' 을 내놓았어요. 고문 뿐 아니라 공권력 남용에 의한 피해까지 다 대상이 되어야 하겠지요."

-사회적으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오늘 누리는 인권은 과거의 누가 희생 덕분에 누리는 것이지요. 이 분들의 치유에 모든 이들이 나섰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사회정의가 이뤄져야 해요. 심리적인 안정감을 취했다가도 사회정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증상들이 재발하거든요. 2007년 하반기에도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다시 잡아가지 않느냐고 굉장히 불안해하셨어요. 하물며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된다면 공포심은 말로 못하지요. 전두환이 저렇게 떵떵거리며 사는 걸 보는 마음은 어떻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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