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공개된 미국 국가정보위원회(NIC)의 보고서 '글로벌 트렌드 2030'은 한국 시각으로는 다소 엉뚱하게 보인다. 19세기 영국의 대표 작가 찰스 디킨스의 역사소설 로 시작하는 서문부터 그렇다. "의 배경은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여명기였다. 우리는 그와 동일한 전환기에 살고 있다. 지금 시대 변화의 폭과 범위 그리고 좋고 나쁨은 18세기 후반 정치 경제적 혁명의 여파에 못지 않다."
대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프랑스에서는 쿠데타와 전쟁이 잇따르고 정치 체제가 수시로 바뀌며 헌법이 열두 차례 개정됐다. 그 시대의 중심지 파리와 런던에서는 산업혁명과 맞물려 새로운 상공 시민계층인 부르주아가 태어났지만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한 민중은 여전히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 NIC의 보고서가 디킨스의 역사소설에 기대 상상력을 발휘한 것은 변화의 속도가 빨랐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도 미래를 가늠키 힘들다는 고백으로 들린다. 무엇이든 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능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빛과 어둠의 시대가 우리의 미래에 반복될 수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NIC의 보고서가 엉뚱한 다른 이유는 그것이 정보를 염탐하는 정보기관의 미래 전망이기 때문이다. 5개 대륙의 20개 국가 전문가들을 만나 초안을 주고 반응을 청취한 과정은 단순 정보를 모아 놓은 게 아니라 비전을 담으려 한 고민의 흔적들로 보인다. 그런 노력이 흥미로워 보이는 것은 현실 정치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한국 정보기관의 행태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보고서는 미국을 동급 최강, 중국을 경제대국으로 결론 내렸다.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의 모습까지는 아니더라도, 글로벌 도전에 응전할 유일한 주도 국가의 면모는 유지하는 것으로 돼있다. 중국은 하기에 따라 최악의 시대도, 최고의 시대도 맞이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로 평가됐다. 보고서는 이렇듯 두 국가가 그려낼 양자관계에 세계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미국, 중국과 달리 한국은 반 쪽짜리 문장 속에 "통일된 한국이 미국에서 멀어지는 전략적 조정을 할 수 있다"며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날 미중 관계 변수의 하나로만 짧게 기술됐다. 이틀 뒤 선거로 탄생할 한국의 새 정부가 글로벌한 안목과 현실 인식을 키우기에 더 없는 교재로 보인다.
이 보고서가 가장 엉뚱하게 보이는 점은 선거 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다. 미국의 정보기관 16곳이 모두 동원돼 작성하는 NIC 보고서는1992년부터 4년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시기에 발표되고 있다. 선거라는 논란의 시점을 피한 것은 보고서의 객관성을 지키는 동시에 차기 정부에 이를 토대로 장기 국가 전략을 짜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이 같은 파워 엘리트들의 움직임이 최고의 리더를 만드는 기반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보고서가 나온 11일 한국에서는 국가정보원의 불법 선거 개입 의혹이 터졌다. 가부를 떠나 의혹이 대선 막판의 변수로 등장한 것 자체가 국정원에게는 과거를 떠올리게 만드는 부끄러운 일이다. 국정원이 의혹에 휩싸일 만큼 한국 정치와 집권세력에 얽매여 있을 때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20년 뒤 세계와 미국의 역할을 논하고 있었다. 21세기 초 워싱턴과 서울 두 도시의 이야기는 이처럼 다르다.
18세기 말 두 도시 파리와 런던은 변화를 주도하는 도시, 그 폭풍에 휩쓸려 고통스러워하는 도시, 지혜와 어리석음 그리고 믿음과 의심의 도시였다. NIC의 '글로벌 트렌드 2030' 보고서는 의 첫 문장 중 굳이 이 대목을 인용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우리 모두는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서울의 미래는 어느 쪽일까.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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