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과학 논문을 정식으로 발표하는 자리는 학술지다. 학술지에서는 투고된 논문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에게 심사를 의뢰하고, 심사자는 논문에 모순이 있는지, 연구 결과가 학술지에 발표될 만한 가치가 있는지 검토한 후 편집자에게 의견을 전해서 최종적으로 학술지 게재가 결정된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또한 학술지에 출판되기 전에, 논문을 미리 배포해서 서로 나누어보고 논의하는 전통이 있다. 그 이유는 심사와 논문 수정 과정을 거쳐서 논문이 학술지에 출판되기까지는 적어도 몇 주 이상, 보통은 몇 달에서 심하면 1년 이상이 걸리기도 하기 때문에, 학술지에 실린 논문만을 가지고서는 연구의 진행 및 현재 논의되는 주제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문을 출판 전 배포본이라고 한다. 논문을 쓴 사람은 심사하기 전의 배포본을 통해 다른 학자들로부터 논문에 대한 의견이나 반응을 빠르게 얻을 수 있고, 연구의 선취권을 확실히 할 수 있으며, 다른 학자들은 배포본을 통해 최신의 연구 진행과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출판 전에 배포본을 통해서 다른 학자들과 소통하는 것은 지금은 거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예전에는 배포본을 일반 우편으로 세계의 연구소에 직접 보냈다. 연구소마다, 다른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보내오는 배포본을 정리하는 것이 커다란 작업이었다. 대규모 연구소가 되면 배포본을 보내오는 곳도 많아서,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해야 했다.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CERN)의 도서관을 들어서면 새로 나온 학술지를 비치하는 칸보다 앞쪽에, 배포본을 진열하는 칸이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런 전통은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러한 작업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입자물리학자인 폴 긴스파그가 만든 로스알라머스 논문 데이터베이스다. 하버드대에서 가르치다가 로스알라머스 국립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긴스파그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을 떠나 있을 때 만든 넥스트라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1991년 8월부터 이메일로 논문을 받아서 배포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92년 CERN에서 월드와이드웹이 발명되었고 93년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과 거의 비슷한 웹브라우저가 등장했다. 긴스파그는 곧 논문 데이터베이스를 웹에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로스알라머스 국립연구소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던 데이터베이스는 긴스파그가 코넬대로 옮기면서 지금은 코넬대에 의해 운영되며, 전 세계적으로 14개의 미러 사이트가 있다. 처음에는 물리학 분야의 논문만을 받았으나, 20년이 지난 현재는 수학, 천문학, 컴퓨터 과학, 비선형 과학, 정량적 생물학, 금융공학, 통계학 등의 분야로 확장되었고, 보유하고 있는 논문은 70만 편이 넘었다. 웹사이트는 완전히 공개되어 누구나 접근할 수 있고, 논문을 받아 보거나 실을 수 있다. 관심있는 사람은 한 번 구경해 보아도 좋겠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바야흐로 다른 형태의 학술지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적어도 물리학에서는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인프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에 들어서 과학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현상을 발견하고, 완전히 새로운 원리를 깨우침으로써, 인간의 사고의 영역을 거대하게 확장했다. 그러한 과학 연구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평가될 수 없다. 오늘날의 과학 연구 결과는 학문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인 자세로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서 검증되고 확인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과학 지식을 현대 사회의 가장 확실한 지식으로 만드는 핵심 요소다. 그러니까 오늘날 진정한 힘은 비전의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개된 원칙 위에서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서 다다른 답에 있다. 그것이 옳은 답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이다.
소통의 중요성은 비단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최근 들어 소통이 되지 않는, 혹은 소통을 거부한다는 것의 폐해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소통 능력이란 있으면 좋은 옵션이나 잘 되면 멋있는 패션이 아니라 확실한 지식을 얻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방법이며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강영 경상대 물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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