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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12월 17일] 지우개 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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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12월 17일] 지우개 도장

입력
2012.12.1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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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S를 만났다. 그는 작은 낭독회의 기획을 맡게 되었는데, 장소대관을 위한 계약서를 작성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일이 끝나면 커피나 한 잔 할 겸 나는 그와 동행을 하기로 했다.

약속장소인 사무실에 도착하자 직원은 '갑'과 '을'의 조항을 길게 나열한 계약서를 내밀며 도장을 가져왔냐고 물었다. S는 도장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며 사인을 해도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반드시' 도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저 길 건너에 도장 파는 가게가 있다고 일러주었다. 지금 다녀오라는 뜻이었다. 이번에는 S가 고개를 저었다. 즉석에서 막도장을 파오는 것과 사인을 하는 것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직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살짝 싸늘하고 팽팽한 기운이 흘렀다.

잠시 후 S가 내 쪽을 보고 물었다. "지우개 있어?" 나는 5년째 사용하고 있는 지우개를 건네주었다. 그는 지우개의 거뭇한 때를 손끝으로 벗겨낸 후 좌우가 뒤바뀐 모양으로 이름을 써넣었다. "잠시만요. 직접 팔게요. 이런 게 진짜 도장이죠." 그리고 얼굴을 깊이 숙이고 샤프펜슬의 끝을 이용해 이름 부분을 파내기 시작했다.

한심하다는 듯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직원이 결국 손을 들었다. "됐어요. 조각은 집에 가서 하시고요, 여기 사인하세요."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빙그레 웃었다. S의 고집이 맘에 들었다. 그 고집의 흔적이 나의 지우개에 남아 있어서 즐거웠다.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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