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교사 엄지숙(26ㆍ가명)씨는 서울에서 맞벌이하던 부모님이 이혼한 뒤 전남 광양의 할머니집에서 7~10세를 보냈다. 할머니는 어린 엄씨를 돌볼 형편이 못 됐다. 시각장애인이어서 외출하는 할머니를 안내하느라 학교를 결석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엄씨를 보살펴 준 것은 공부방 선생님이었다. 보충 공부를 시켜 주고, 음식과 옷도 챙겨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친척집으로 오면서 공부방은 더 이상 다니지 않았지만, 공부방 선생님은 잊지 못했다. 엄씨는 그 때부터 교사를 꿈꾸게 됐다. 일부러 전문계고 유아교육과로 진학해 3년간 공부했고, 고교 졸업 1년 만에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21세 때부터 어린이집 교사로 일해 벌써 5년이나 됐고, 2년간 다른 교사들을 관리하는 주임도 맡아 봤다. 엄씨는 "부모처럼 돌봐준 공부방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말했다. 일찍 자립하겠다는 굳은 의지는 실현됐고, 올 2월 결혼도 했다. 엄씨는 새로운 목표도 갖고 있다. 주위에서 전문대나 4년제 대학을 나온 교사를 보면서 다시 자극을 받게 된 그는 "기회가 되면 대학에 진학해 배움의 갈증을 풀겠다"고 말했다.
공부방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된 이들의 삶은 팍팍했다. 불우하고 외로웠다. 그러나 그들에겐 용기가 있었다. 삶을 속이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가는 용기다. 한국일보가 만난 공부방 출신 20대 10명은 사회 진출 초년생으로 취업이 가장 큰 문제였다. 조사 결과 정규직이 3명, 임시직 4명, 대학생 2명, 무직(취업준비) 1명이었다.
올해 2월부터 대학병원 정규직 간호사로 일하는 임모(23)씨도 공부방을 통해 자립했다. 세 살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경남 창령의 조부모 집으로 가게 된 그는 부모의 사랑에 늘 목말라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닌 공부방이 낙이었다. 그는 "공부방 선생님의 조건 없는 보살핌에서 나도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 때부터 공부에 매진했다"고 했다. 나중에 재혼한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학원도 다녔다. 중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고교도 내신 2.1등급의 상위권을 유지해 지방 국립대 간호학과를 진학했다. 그는 "불우한 환경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며 "앞으로 간호대학원에 진학해 강단에 서고 싶다"며 굳은 의지를 밝혔다.
뚜렷한 목표를 갖고 대학까지 진학한 공부방 출신자들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방 국립대 중문과 졸업예정으로 항공사 취업을 준비 중인 박모(23)씨는 "요즘 내 또래 아이들은 형제가 1, 2명인 경우가 많아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며 "단체 생활을 해온 공부방 출신자들은 작은 것도 나눌 줄 알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 조직에 더 쉽게 융화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이들과 달리 취업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세 살부터 초등학교 5학년까지 공부방을 다녔던 김은영(24ㆍ가명)씨는 2009년 전문대 경찰행정학과 졸업 후 1년간 준비한 순경공채에 낙방한 후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다. 가정형편 상 순경시험 공부는 계속할 수 없었고, 은행청원경찰, 삼성 LCD TV 생산직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건강이 나빠져 그만뒀다. 지금 직업상담사 자격시험을 준비 중인 그는 "하루 빨리 안정적인 직장을 잡아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경기 부천의 한 주민센터에서 임시로 사회복지 보조 업무를 맡고 있는 임하나(20ㆍ가명)씨도 취업 문제로 걱정이 태산이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여동생과 같이 경기 시흥 고모 댁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는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2년째 안정된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주민센터 임시직도 초등학교 6학년부터 6년간 다닌 공부방 선생님의 소개로 얻은 자리다.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1년 계약으로 근무했는데, 그 사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 가까스로 1년 재계약을 했다. 그는 "사무직 자리라도 알아보려 컴퓨터활용능력 워드 파워포인트 등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 수 차례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허사였다"며 "이제 성인이 돼 자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다"고 말했다.
경기 부천에서 26년간 범박공부방을 운영해 온 지부예(50)씨는 "모자랄 것 없이 자란 요즘 아이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공부방 출신들은 어릴 때부터 온갖 일을 겪으며 잡초처럼 강하게 자라 끈기 있고, 생존력이 강하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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