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내 기록을 되돌아 보니까 용서 못할 사람이 없더라고요. 자서전은 지난 걸 정리하고 남은 걸 대비할 수 있는 교과서예요."
지난 7일 오후 서울 광진구 광진정보도서관의 한 강의실. 대학생 자녀를 둔 어머니, 직장 다니는 딸을 대신해 매일 2살짜리 손녀를 돌봐야 하는 할머니, 수년 전 교직 생활을 마감한 전직 교사까지, 60~80세의 평범한 이웃 9명이 각자 태어난 고향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TV에 나오는 유명인과는 거리가 먼 이들은 모두 자서전 책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지난 4월부터 5개월 동안 1주일에 2시간씩 도서관에서 마련한 '시니어 자서전 강의'를 들으며 지나온 기록을 정리한 결과물이다.
비록 90쪽 분량의 손바닥만한 자서전이지만 작가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글로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전업주부였던 배정인(65)씨는 "60~70년 전 기억부터 억지로 꺼내 기록에 남기려니 머리 속 생각만으론 글감이 떠오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럴 때마다 꺼내 봤던 오래된 사진첩은 책을 내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배씨는 "사진을 꺼내 보다 웃기도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 고향 친구들이 그리워 울기도 하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옛 기억들을 수첩에 적다 보니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자서전은 이들에게는 추억의 사진첩이다. 해군 장교 출신의 김현덕(71)씨는 "30년 군 생활을 마감하고 나니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졌고 과거의 순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휴지통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었다"며 "자서전을 쓰다 보니 영영 사라졌을 것 같던 내 인생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펼쳐보는 기분이었고, 부자가 된 듯 뿌듯했다"고 말했다.
막상 자서전을 쓴다고 하자 가족들의 반응은 대부분 "낯 뜨겁게 왜 그런 걸 쓰냐"는 것이었다. '워킹맘'인 두 딸을 둔 함수연(60)씨는 "가족들이 남세스럽다며 말리기도 했지만 두 딸을 낳았을 때 기억을 책에 담아 딸들에게 선물하면 엄마가 된 딸들에게도 더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아 내가 고집을 부렸다"고 말했다. 함씨는 "이제는 딸이 손녀들에게 책을 직접 읽어 줄 정도"라며 "부모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사랑과 좌절의 순간이 있었다는 점을 알고는 딸들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웃었다.
태어나 처음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책을 출간하는 것이니만큼 모든 것이 만만치 않았던 도전이었지만 이들 곁에는 든든한 도우미가 있었다. 시니어 자서전 쓰기 강의를 맡은 방송작가 이인경씨다. 그는 강의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듣고 가장 먼저 지난해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40년 간 살가운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는 그는 "아버지한테도 어렸을 적 꿈, 첫사랑의 설렘, 세상에 태어난 첫 딸을 맞은 기쁨의 순간이 있었을 텐데 그걸 공유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고 말했다. 이씨는 "뒤늦게나마 아버지의 주변 분들이 해주는 얘기를 통해 평생 무관심했던 아버지를 인간적으로 알게 됐다"며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 모르고 살아온 거 같아 보통 사람들도 자서전을 써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김현빈기자 hb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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