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해운업계의 연간 선박해체 규모가 사상 처음으로 5,000만DWT(재화중량톤수=적재 가능한 화물의 톤수)를 넘어섰다. 거듭된 조선ㆍ해운경기 불황으로 배를 놀리느니 차라리 고철로 파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판단에서다.
14일 영국의 조선ㆍ해운 분석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달까지 누적 선박 해체량은 5,230만DWT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연간 폐선 규모는 5,800만DWT를 이를 것으로 조사돼 지난해 기록한 최고치(4,260만DWT)를 가볍게 제칠 전망이다. 폐선물량은 조선 경기가 한창이던 2008년만 해도 1,420만DWT에 불과했으나 4년 새 4배나 폭증했다.
폐선증가는 조선ㆍ해운업황 침체 및 선박 공급과잉과 맞물려 있다. 올해 전 세계 조선소의 수주량은 3,520만DWT(10월말 기준)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0.5%나 감소했다. 영업 지속 여부를 가리는 수주잔량도 2005년 이후 가장 적어 일감이 아예 없는 전 세계 조선소가 이미 700곳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2~3년 전 호황일 때 발주한 선박은 속속 시장에 나오는데 경기침체로 물동량은 줄고, 신규주문도 전무하다 보니 낡은 선박을 해체해 고철로 되파는 게 이익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실제 올해 철근의 원료인 국제 철스크랩 가격은 톤당 500달러를 호가하며 업체들에 괜찮은 마진을 남겼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배는 운항을 하지 않더라도 정박비와 유지비 등 고정비용이 들어간다. 일감이 없어 배를 놀리느니 차라리 해체해서 고철로 파는 게 나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다 보니 오래된 낡은 배뿐 아니라 20년도 안된 비교적 새 선박을 해체하는 사례까지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환경규제가 강화된 점도 폐선증가를 부추긴 요인으로 꼽힌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00년대 중반부터 단일선체 유조선을 퇴출시키는 규제안을 시행하고 있다. 대규모 기름유출 등으로 해안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선체를 이중구조로 바꾸는 친환경 정책을 강화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 단일선체로 되어 있는 배들은 해체 수순을 밟고 있다. 또 내년부터 온실가스 규제협약이 발효되면서 국제 항해선박들도 2025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지금보다 30% 감축해야 한다.
그러나 폐선이 늘어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해운시장을 짓누르고 있는 선박 과잉에 대한 부담을 누그러뜨리기 때문이다. 노후 선박은 퇴출되고, 수급구조가 정상을 되찾으면 신규 발주 증가와 함께 시장이 친환경ㆍ고연비 선박 위주로 재편되는 효과가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배춧값이 떨어지면 팔지 않고 밭을 갈아엎어 가격을 끌어올리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말했다.
유재훈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친환경 선박들은 일반 상선과 비교해 대략 5~10% 정도 연비를 절감할 수 있다"며 "기왕이면 요즘처럼 가격이 바닥을 쳤을 때 배를 교체해 환경기준과 미래 수요에 대비하려는 포석"이라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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