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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의자, 한 사람 분의 고독·꿈·시간·기억이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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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의자, 한 사람 분의 고독·꿈·시간·기억이 머물다

입력
2012.12.14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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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다양한 변주 가능한 가구 조형의 기초이며 궁극88만원세대·해고 노동자에겐 절박한 갈망과 생계 걸린 자리스스로 공간을 창조하는 빈의자는 빈공간이면서 채워진 자아의 공간

가구 디자이너에게 의자는 소(小)우주나 분신과 같은 존재다. 모든 작품이 다 그렇겠지만, 자신의 디자인 철학과 역량을 다 쏟는 절정의 목표, 최종 도전의 대상으로 의자를 꼽는 이들이 많다. 그것은 의자의 형태와 구조 안에 가구라는 장르의 원형적ㆍ본질적 요소가 응집돼 있는데다 조형적 창의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의자는, 모든 가구가 그렇듯, 수평과 수직의 면과 선들이 치열하게 맞서 그 밀치는 힘으로 서로를 껴안는 구조다. 그럼으로써 전체가 하나의 완결적 구조를 이루고, 그렇게 완성된 존재가 또 한 사람의 온전한 공간을 구축한다. 의자는 공간을 소비하면서 스스로 공간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빈 의자는 빈 자리인 동시에 뿌듯하게 채워진 자아의 공간이 된다.

의자는 다리와 안장, 등판으로 이뤄진다. 그 각각의 부분을 이루는 부재(部材)의 스케일을 달리 하면 의자는 침대도 되고 벤치나 테이블도 되고, 약간의 응용만으로 장이나 농으로 변신할 수도 있다. 인체 비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궤나 선반 등 비(非) 인체계 가구와 달리 몸의 부분비례라는 상수(常數)와 기능적 편리성, 구조적 안정성 등에 특별히 예민한 가구가 의자다. 비 인체계 가구는 더러 가구의 범주를 벗어나 오브제의 영역을 넘보기도 하지만, 의자는 적어도 의자인 한 디자인적으로 좀 무리를 하더라도 가구로서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대신, 침대나 책상과 달리, 심심한 수평면과 따분한 수직의 구조만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 침대의 상판은 기울어지거나 구부려질 수 없지만 의자의 안장은 다르다. 몸의 하중을 분산하기 위해 엉덩이의 곡선을 희화화할 수도 있고, 척추와 등을 편안하게 지탱해주기 위해 등판에도 다양한 곡면을 채택할 수 있다. 책상 다리는 사선으로 땅과 이어질 수 없지만 의자의 다리와 등판은 뒤로 벌어질 수도 있고, 둥그렇게 휠 수도 있고, 다리 숫자를 늘리거나 줄일 수도 있고, 아예 없앨 수도 있다. 요컨대 인체계 가구로서의 디자인적 억압에 맞서 미적 가치를 구현하려는 디자이너의 조형적 자유가 상대적으로 넉넉한 것이 의자다.

의자가 가구의 꽃으로 꼽히는 이유, 숱한 가구의 거장들이 의자를 자신의 디자인적 성취의 상징으로 삼는 까닭이 대체로 저러하다. 모방품의 대중화로 우리 눈에 익은 '바르셀로나 의자'의 작가 겸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말- 빌딩 하나를 짓는 것보다 의자 하나를 디자인하는 것이 더 어렵다(김상규 저 에서 인용)-은 그리 심한 엄살이 아닐 것이다. 의자는 가구, 나아가 구조 조형의 기초이며 궁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간으로서의 의자는 여타의 가구들과 달리 독립적이다. 사람이 있든 없든, 다른 가구와 짝을 짓지 않고도 홀로 빈 공간에 놓여 고독한 위엄의 자리를 만든다. 동시에 개별적이다. 수백 수천 개의 의자가 놓여도 각자의 의자는 온전한 자신의, 그리고 한 사람 분의 공간을 구축하면서 개성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적이다. 침대나 책상과 달리 의자는 광장이나 극장에 홀로 또는 여럿이 나서는 데 스스럼이 없다.

저 모든 성격은 의자의 다양한 쓰임새에 기인하기도 하고, 거꾸로 기여하기도 한다. 현대인에게 의자는, 잠 잘 때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일상의 행위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쉬고 노는-이 이루어지는, 드물게는 마지막 숨을 들이쉬며 세상과 작별하기도 하는, 공간이다. 그 자리들은 한 사람이 깃들여 살고 있는(살아온) 이 우주 안에서의 공간적 좌표인 동시에 사회적 좌표다.

책상을 마주하고 의자에 앉아 일할 때, 혹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회의를 할 때 의자는, 특별히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한, 특별한 존재감이 없다. 사무 공간을 둘러보더라도 책상을 주로 살피지 의자에 주목하는 경우는 드물거나 아주 잠깐이다. 한 자리에서 몇 년째 일하면서도 의자 등판이나 다리의 재료가 뭐며 어떤 곡률로 휘어져 있는지, 회전의자의 경우 바퀴가 몇 개이며 또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볼 겨를도 성의도 없다. 사무직이라면, 그 의자는 하루의 거의 절반 동안 육체를 지탱하는 노동의 공간이다.

사무 의자는 대개 최대한 오래 앉아 있을 수 있게 만들어진다. 지나치게 푹신해서 비뇨기계통의 혈류나 신경을 압박하지 않으면서, 척추나 허리 목에 최대한 무리를 주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여가와 휴식의 자리로서의 의자는 안락함이 중시된다. 안장은 최대한 푹신해야 하고, 등받침의 기울기도 상체의 기울임에 따라 순하게 따라 누워야 한다. 한 사무공간 안에서도 직급에 따라, 재질의 차별성뿐 아니라 등받침의 높이나 기울기 반경이 다른 경우가 드물지 않다. 하위직의 의자일수록 지구력의 유지에 배려하고 고위직의 것일수록 안락함을 배려한다.

의자의 저 상반되면서도 보완적인 두 기능의 조합은 권력귀족의 전유물이던 의자의 태생적 상징성을 흐릿하게나마 유지하고 있다. 의자의 유래는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상의 가구로 보편화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100년 남짓에 불과하다고 한다. 권좌라는 말, chairman이라는 단어에서 감지되듯, 의자는 긴 세월 동안 '특별한 자리'로 군림해왔다. 그것이 노동(산업) 형식의 변화와 더불어 보편화했고, 입식 문화의 정착과 함께 일상화했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모든 의자는 계급 계층의 상징성을 내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잡다한 종류의 의자들을 한 데 모아놓은 비일상적 유흥의 공간에서도 부피나 재질, 구조 면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의자가 있기 마련. 우리는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무리들 가운데 알파 존재의 몫으로 그 의자를 비워두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동시에 의자는, 작가 공지영이 편저한 쌍용차 사태 르포집 에서처럼 특권의 자리가 아니라 생계의 자리, 존재의 자리로 확장된다. 미취업 88만원세대에게, 해고노동자에게, 구직자에게 의자는 절박한 갈망의 자리이자 이 사회의 계급 계층적 갈등과 모순,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들이 한 데 모인 공간의 상징이 된다. 용케 자리를 차지한 이들도 연말 연초 인사이동 시즌마다 의자를 바꿔 앉아야 한다. 자리를 옮기는 이들은 옛 유행가가 '사장님 의자'라며 부러워하던 회전의자 위에 잡다한 사무용품을 싣고 이사를 가기도 한다. 승진의 기쁨 혹은 좌천의 씁쓸함을 곱씹으며, 새 의자의 높이를 자신에게 맞춘다. 그 낯선 느낌과 어색하게 교감한다.

서재나 침실에 놓아두는 나만의 의자(흔들의자나 일인용 소파, 라운지 체어 등)도 있다. 하루의 노동을 끝내고 일상을 되돌아보는 시간. 그 때 의자는 내밀한 애착의 시간을 지탱하는 공간, 내가 나를 격려하고 존중해주는 자리가 된다. 누군가 뒤에서 기분 좋게 포옹해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멋진 의자를 만나기란 쉽지 않지만, 운 좋게 찾아낸 이라면 그 의자는 자신의 생애의 의자가 되기도 한다. 물론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이겠지만, 당장 여유가 없어 상상만 하거나 빈 자리로 놓아둘 망정 거기 아무 의자나 놓지는 않겠다는 고집쯤은 부려볼 만하다. 그 때의 의자는 출세의 목표와는 다른, 어떤 귀한 시간에 대한 희망이자 꿈이다. 대통령 후보쯤 되는 유력인사가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에 놓아두고 쓰는 의자- 예컨대 문재인 후보의 찰스 임스의 라운지체어(No.670)-가 개성도 볼품도 없는 것이라면, 소박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는 내보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몰취향의 이미지도 함께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초ㆍ중등 교실 걸상을 맨 처음 디자인한 이는 누구였을까. 이제는 철제 구조물에 합판을 휘어 붙인 가벼운 의자들도 많지만, 근 백 년 동안 매년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앉거나, 이어놓고 눕거나, 무릎 꿇고 앉아 두 팔로 쳐들기도 하던 그 클래식한 소나무 의자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의자는 공간의 기억, 시간의 기억이 머무는 자리이기도 한 모양이다.

미국의 시인 콘래드 에이컨이 홀로 앉아 지나가는 배들을 응시하곤 하던 강 언덕 위에 훗날 묻힌 뒤 묘석 대신 놓아두게 했다는 벤치(존 베런트의 논픽션 에서 인용. 이후 무덤 자리에 의자를 남기는 이들이 더러 있다고 함)처럼, 존재와 기억의 더 선명한 상징물로서의 의자도 있다. 그 순간 의자는 쉘 실버스타인의 의 나무둥치처럼, 마지막 베풂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홍인기기자 hongik@hk.co.kr

최윤필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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