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식사를 하자며, 막 탈고를 끝낸 어린 후배와 식당에 찾아갔다. 일본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새로 생긴 음식점이었다. 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워왔을 후배를 생각해서 그 식당에서 가장 비싼 정식 2인분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후배가 썼던 작품에 대해 귀담아 듣고 있을 때, 종업원이 다가와 주문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했다. 우물쭈물거리며 말하고 있어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정식은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해서 곤란하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알고 주문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종업원이 돌아가자 후배는 종업원이 안 됐단다. 내게 조금도 공손하게 말해도 되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처음 주문을 받을 때부터 자잘한 실수를 연거푸했던 터라 나는 조금쯤 불만이 있던 차였다. 내 목소리가 다소 퉁명했던 건 사실이지만 충분히 정중하지 않았느냐고 나는 말했다. 서비스 정신에 대해서도 말했고, 내가 지불할 비싼 음식값에는 서비스요금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고, 여기는 분식집이 아니지 않느냐고, 이 정도는 손님의 권리라고도 말했다. 다 맞는 말이지만, 이런 식당이라고 해서 시급이 특별히 다르지는 않다고, 종업원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은 업주의 잘못이지 종업원의 잘못은 아니라고, 어쨌거나 겨우 그 시급을 받고 일하고 있는 저 어린 친구에게 우리라도 훈훈하게 대했으면 좋겠다고, 자신도 꽤 오랜동안 최저시급을 받고 식당 알바를 해봤기 때문에 손님의 권리보다는 종업원의 고단함이 먼저 챙겨진다고 후배는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마음을 알겠다고 앞으로는 조심을 하겠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퉁명하게 말했다는 것말고는 그다지 예의에 어긋난 언행을 한 것도 없는데 핀잔을 듣는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렇게 무례했구나. 혼잣말을 되뇌이니 후배는 내게 마지막 말을 보탰다. 선배는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그 자체가 어린 친구들에겐 권위여서 조금만 편치 않아 보여도 눈치를 볼 수도 있는 거라고.
나이를 그리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예민한 어떤 순간들에서 나는 나이 때문에 좀더 신중한 태도를 했어야 한다는 후회와 요새 자주 만난다. 조그마한 푸념도 어린 친구들에겐 부담이 되고, 애써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는다면 어린 친구들은 내 눈치를 살핀다. 어디 아프냐고도 묻고 뭔가 잘못된 것이 혹시 있느냐고도 묻는다. 누군가에게 부담을 주는 나이가 서서히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보고 싶은 글벗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송년모임도 잘 나가지 않게 되었다. 애써 마음을 쓰지 않으면 나보다 어리거나 나보다 더 불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일이 점점 쉽지가 않아진다. 가끔은 바보인양 으헤헤 웃어야 하고 가끔은 철부지인양 촐싹거려보기도 해야 한다.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그런 오버가 필요해질 때가 있다. 모자르게 굴거나 애교를 부르지 않는 한,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점점 줄어들게 생겼다.
십년 전쯤이었을까. 무척이나 존경하던 선생님과 취재를 함께 하게 되어 여행을 갔고 친해졌다. 나이차이는 많았지만 여행을 함께 하다보니 푸근한 모습, 털털하고 인간적인 모습, 아이처럼 천진한 모습 같은 걸 자주 목격할 수 있어 좋았다. 글에서만 느껴졌던 품위의 다른 면을 발견하면서 이 선생님이 더 좋아졌고 존경하는 마음도 남달라졌다. "존경하는 선생님!"이라고 용기를 내어 연하장을 보냈는데 선생님은 그걸 조금 섭섭해하셨다. '좋아하는'이 '존경하는'보다 더 듣고 싶은 말이라며. 내게 있어 '존경하는'은 '좋아하는+우러러보는' 정도의 뜻이 담겨 있었던 터라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린 후배들에게 내가 듣고 싶은 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자격이 모자른 것 같아 물러서게 될 것 같고,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저 좋기만 할 것 같다. '좋아하는'에는 '존경하지만 친구처럼 다정하여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이란 뜻이 있음은 이제사 알아가고 있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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