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상처를 보듬고 개혁을 강행한 광해군. 그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쫓겨나 묘호(廟號)조차 얻지 못한 왕이다. KBS 1TV가 13일 밤 10시에 방송하는 '역사 스페셜'은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는 광해군의 일생을 통해 왕의 조건은 무엇이며 왕이 무엇을 잃었을 때 성군에서 폭군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조명한다.
1623년 3월 12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밤 조정에는 이미 역모의 움직임을 고발하는 상소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광해군일기). 은 '상궁 김개시가 성지는 지극히 충성스러운 사람이니, 다른 모의를 할 것입니까'하니 광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적었다.
역모의 고변을 물리치게 한 상궁 김개시는 누구인가. 한글로 김개똥, 천민의 딸인 그녀는 나인으로 입궐해 세자시절 광해군을 보필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15년간 최측근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실록에 따르면 그녀는 나이도 많고 외모도 출중하지 않았다. 천민출신에 미색도 아니었던 그녀는 광해군 옹립에 결정적 도움을 주면서 광해군의 마음을 얻었다.
대내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해 사대부들의 기득권을 제한하고 중립적인 외교 정책으로 실리를 챙겼던 광해군의 몰락은 측근 비리에서 시작됐다. 최측근인 김개시는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광해군의 지지 세력이던 대북파 우두머리 이이첨은 붕당 경쟁에서 왕의 권력을 등에 업기 위해 살해 사건을 역모 사건으로 위장하기도 했다. 잇따른 역모 시도에 광해군은 왕권을 확고하게 세우기 위해 궁궐 공사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게 되고 무리한 토목 공사로 민심은 땅에 떨어졌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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