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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막하고도 너무 아름다운… 사막과 펭귄이 지척에 '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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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막하고도 너무 아름다운… 사막과 펭귄이 지척에 '경이'

입력
2012.12.1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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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미래가 SF영화 '토탈리콜'처럼 펼쳐진다면, 서기 2084년엔 지구 관통 열차를 타고 17분이면 가겠지만, 아직은 비행기에 앉아 기내식을 네 번은 먹어야 한다. 멀다. 환승 대기시간 빼고 하늘에 떠 있는 것만 대략 20시간이다. 세 번째 기내식 포장을 뜯을 즈음이면 불쑥 의문이 치민다. '잉카의 돌무더기를 보자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할까?' 그리고 한참 뒤 지구의 반대쪽에 착륙한다. 계절도 하늘의 별자리도 화장실 물 내려가는 방향도 정반대인 남아메리카의 고도 리마. 결론부터 털어놓자. 지구 반 바퀴, 아니 한 바퀴 반을 도는 수고라도 기꺼이 견디고 찾아가볼 만한 곳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 곳 페루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표정을 지닌 나라!'라는 게 적절한 답이 될 듯하다.

아마도 황금의 제국 잉카의 이미지_그 얘긴 다음 주에 하자_밖에 떠오르는 게 없겠지만, 페루라는 나라는 그것 말고도 다양한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인구는 2,900만명 정도인데 땅덩이의 넓이는 남한의 13배나 된다. 그 가운데 59%는 식인 물고기 피라냐가 사는 아마존 열대 우림이고 30%는 안데스 산맥의 고원 지대, 나머지 11%가 인구가 밀집된 해안 사막 지대다. 수도 리마는 해안에 있다. 페루 여행도 이곳에서 시작된다. 리마는 연평균 강수량이 3.5㎜밖에 안 되는 메마른 땅이다. 그러나 훔볼트 해류와 적도반류가 만나는 남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이 도시의 아침은 늘 짙은 안개로 시작된다. 바다가 뱉은 안개가 두텁고 촉촉했다.

사막의 일출을 안개에 가둬버리는 비밀스러운 대기로 감수성은 한껏 자극된다. 그래서 로맹 가리는 이 도시를 배경으로 소설 를 썼을 것이다. 썼을 것인데, 내가 포함된 일행(기자들)의 감수성은 그런 류와는 거리가 멀어서, 우리는 조금은 무질서한 듯한 리마의 자유 분방함이 좋았다. 이 도시에는 카지노가 5,000개나 된다. 리마에 머무는 동안 한 신문사의 L은 적잖은 달러를 "기념품"으로 획득했고, 다른 신문사의 L은 그만큼의 달러를 "페루 인민을 위해" 희사했다. 우리는 모두 즐거웠다. 이 도시의 대표 음식은 중국 음식과 유럽 음식이 섞인 치파(Chifa), 마시는 음료는 노란 빛깔의 잉카 콜라이고, 거리의 남루한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건 희대의 포퓰리스트 후지모리 전 대통령이었다.

리마에서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뻗은 사막에는 고대 문명의 흔적이 밀집돼 있다. 잉카 문명이 시작된 것은 15세기다. 그러나 페루의 역사는 기원전 10세기까지 거슬러 오른다. 리마, 나스카, 와리, 치무, 찬카이 등 여러 선(先)잉카 문명의 유적이 모래를 뚫고 얼굴을 내민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리마에서 남쪽으로 31㎞ 가량 떨어진 파차카막 사막에선 여러 층으로 겹친 고대 문명과 스페인 침략자들의 탐욕, 그리고 현재 페루인의 신산스러움이 혼재했다. 창조의 신을 새긴 와리인들의 신전과 성녀(聖女)들을 교육했던 잉카인들의 궁전은, 그것이 황금으로 된 줄 알고 찾아온 16세기 침략자들의 분탕질로 폐허로 남았다. 그 풍경은 황막했고, 또 아름다웠다. 흙벽돌로 만든 게토(빈민촌)가 그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리마 시내와 근교엔 게토가 많다. 1960년대 말 토지 개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농민들, 1980, 90년대 좌익 게릴라의 내전으로부터 도망친 내륙인들, 더 나은 교육환경을 위해 흘러든 지방 출신 빈민들이 모여 수많은 게토를 이뤘다. 게토의 인구만 약 200만명. 지금도 일단 땅을 무단점거하고 나면 정부가 살 권리를 인정해준다. 살다 보면 전기와 수도를 놓아주기도 한단다. 흙으로 얼기설기 쌓은 집 중엔 지붕이 없는 것도 꽤 있었다. 리마 시내 산 크리스토발 언덕의 게토는 색색으로 칠해진 원색 판잣집들로 구시가의 유적들만큼이나 인기가 높다. 가이드는 게토에 대한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 베이징 뒷골목의 후퉁(胡同)처럼, 리마의 게토가 매력적인 관광지가 될 날이 올 거란 예감이 들었다.

리마의 남쪽 경계를 벗어나면 이카주(州)다. 유명한 나스카 라인이 있는 지방이다. 리마 시내에서부터 약 300㎞ 떨어진 피스코에 도착했다. 이곳은 독특한 방식으로 증류한 브랜디와 달걀 흰자, 라임을 섞어 마시는 음료 '피스코 사워'의 원산지다. 200년 전까진 흑인 노예들을 포도 위에서 춤을 추게 만들어 즙을 짰으나 이젠 기계로 브랜디를 생산한다.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숙소에 도착한 밤엔 고급 리조트가 모인 해안 휴양지 정도로 피스코를 여겼다. 그러나 이튿날, 이곳에서 두 가지 상반된 체험을 했다. 바다사자와 가마우지와 펭귄이 지천인 남태평양의 생태, 그리고 태양이 작열하는 사구 위에서의 자동차 질주를 해안선을 사이에 두고 하룻동안 만끽할 수 있었다.

항구에서 18㎞, 보트로 한 시간 가량 걸려 간 바예스타 섬은 구아노(퇴적된 새똥이 화석화한 것)로 유명한 섬이다. 고급 비료인 구아노를 얻기 위해 옛날 잉카인들도 이 섬을 찾았단다. 보호지구로 지정된 지금은 정부가 7년에 한 번씩 구아노를 채취한다. 60종 이상의 조류와 훔볼트 펭귄, 짝짓기 철을 맞은 바다사자의 소리로 섬은 온통 왁자지껄했다. 100만 마리 이상의 새가 날아오르고 내려앉은 모습에 일행은 말을 잊었다. 수백 ㎏은 족히 나갈 것 같은 바다사자가 물 속으로 뛰어들어 포말이 솟구쳤다. 수만 마리 펠리컨의 배설물이 언제 낙하할 지 알 수 없는 해식 동굴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관광객을 태운 배가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엘리뇨 현상이 없던 과거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이 이 작은 섬을 뒤덮었다는 설명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잉카의 고대 도시가 있는 고산지대로 떠나기 전, 페루 해안에서 경험한 마지막 체험은 사막 질주였다. 페루는 지난해 '죽음의 레이스'로 불리는 다카르랠리 코스에 포함됐다. 내년 대회의 출발점은 리마다. 그래선지 요즘 부쩍 사막 레이스가 인기다.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이름의 와카치나 오아시스와 피스코의 파라카스 사막에서 각각 10인승 버기카와 토요타 SUV를 탔다. 굉음을 내는 자동차는 모래 속으로 파묻힐 듯 내리막을 치닫다가 다시 사구의 오르막을 타고 하늘로 점프했다. 바퀴가 공중에 뜬 짧은 순간, 대륙의 한복판 같던 사구의 능선 너머 태평양의 물빛이 보였다. 비명 소리, 엔진 소리, 환호성 소리가 겹치는 사막으로 해가 떨어졌다. 와일드한 페루의 표정에 홍조가 번져갔다.

여행수첩

●한국에서 페루로 가는 직항은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페루행 항공편으로 갈아타는 방법이 편하다. 페루행 운항편이 가장 많은 항공사는 란(LAN)이다. 란항공 한국사무소 (02)775-8219. 대한항공이 내년 상반기 로스앤젤레스를 경우, 리마로 가는 항공편을 취항할 예정이다. ●페루 서부 해안 지역 기온은 연중 15~25도로 온난하다. 스페인어와 케추아어, 아이마라어가 공용어로 쓰인다. 통화는 누에보 솔(sol)로 1솔은 약 440원. 한국 화폐가 환전되지 않으므로 달러나 일본 엔를 준비해 가야 한다. ●리마의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산 프란치스코 교회 등의 유적이 몰려있다. 바예스타섬 보트 투어에는 1인당 25달러가 든다(요트를 대여할 경우 1인당 230달러 정도). 파라카스사막 자동차 투어는 1인당 236달러. 페루 관광청 한국사무소 (070)4323-2560

유상호기자 shy@hk.co.kr

리마ㆍ이카(페루)=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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