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경영하는 현대상선 유상증자에 범 현대가가 모두 불참한다. 이에 따라 현대상선에 대한 현 회장의 지배력은 종전보다 높아지는 반면, 범 현대가의 지분율은 소폭 낮아지게 됐다.
현대상선은 과거 현 회장 측과 범 현대가 사이에 경영권 분쟁이 있었던 기업. 재계에선 이번 유상증자 불참을 두고 "정씨 일가에서 현 회장의 현대상선 지배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현대중공업그룹 관계자는 11일 "재무ㆍ경제적 판단에 근거해 계열사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은 현대상선 유상증자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현대상선은 11,12일 이틀 동안 1,970억원(1,100만주) 규모의 유상증자 청약을 진행 중인데,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의 보유 지분 비율은 각각 16.4%, 7.3%이다. 지분 2.6%를 보유한 KCC도 불참을 확정했으며, 다른 범 현대가인 현대건설(7.7%)과 현대산업개발(1.4%)의 참여 가능성도 낮은 것도 전해졌다.
현재 현대상선의 지분구조를 보면 ▦현대엘리베이터(27.7%)와 우호세력(17.1%) 등 현 회장 측 지분이 44.8% ▦범 현대가가 35.4%를 갖고 있다.
현대상선 지분이 관심을 끄는 건 과거 현 회장과 정씨 일가 사이에 격한 경영권 대결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사망 후 미망인인 현 회장이 그룹을 이끌게 되자, 범 현대가 쪽에선 '정씨가 만들고 키운 현대를 현씨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공감대가 마련됐고 지분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말엔 현 회장의 시숙부이자 정씨 일가의 좌장격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6.2%를 인수해 '숙질(叔姪) 전쟁'을 벌였고, 2006년에는 현대중공업이 현대상선 지분 27.7%를 전격 인수하면서 적대적 M&A 논란이 일기도 했다.
때문에 현대상선을 둘러싼 현 회장 측과 범 현대가의 갈등은 항상 물밑에 잠복된 상태였다. 이번 현대상선 증자를 앞두고 범 현대가의 참여여부가 관심을 끌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범 현대가가 증자불참을 결정함에 따라 정씨 일가에서 더 이상 다툼을 피하고 현 회장의 현대상선 지배를 '인정'하기로 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상선에 대한 현 회장의 지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면 아무리 경기상황이 나빠도 범 현대가에서 증자에 참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불참 결정으로 범 현대가의 현대상선 지분율은 2% 안팎 줄어들게 됐다. 반면 현 회장 측은 실권주를 직접 인수하거나 우호세력에게 넘길 경우 보유 지분이 최대 47%까지 뛰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현 회장 측 경영권 부담이 완전 해소된 것은 아니다. 현대그룹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인 스위스 쉰들러그룹(35.1% 지분 소유)이 최근 제기한 소송결과에 따라 또 다른 경영권 다툼이 불거질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쉰들러는 지난달 30일 "현대엘리베이터의 파생상품 만기 연장과 신규 계약을 금지해달라"며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냈다. 쉰들러 측이 문제 삼는 파생상품이란 현대그룹이 2006년 NH농협증권, 넥스젠캐피탈 등 재무적투자자(FI)와 맺은 우호계약을 말한다. 당시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M&A 시도에 맞서, 현대엘리베이터는 이들 금융사를 우호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조건으로 연 6.15~7.5%의 수익을 보전해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업황 부진으로 현대상선 주가가 하락, 평가손실액이 지난해에만 1,000억원을 훌쩍 넘기게 되자 쉰들러 측은 계약파기 소송을 냈다. 한 시장관계자는 "만약 법원이 쉰들러의 손을 들어줘 현대상선의 우호세력들이 지분을 내놓게 된다면 현 회장 측 지분율은 범 현대가보다도 낮은 20%대로 급락하게 된다. 앞으로 상황변화에 따라 범 현대가의 M&A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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