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한수산, 김현, 고은, 김수영, 김춘수…. 한국 지성계를 관통하는 이 문인들을 하나로 묶는 기호는 '박맹호'다. 이문열과 한수산은 출판사 민음사가 제정해 운영하는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대형 작가로 발돋움했다. 고은과 김현은 그와 의기투합해 '오늘의 시인 총서'를 펴내며 1970~80년대 한국 문단에 '시의 시대'를 열었다. 등단해 15년은 돼야 시집을 낼 수 있던 시단 풍토에서 이 총서로 시재를 널리 알린 신진시인이 김수영, 김춘수다.
국내 최대 매출의 단행본 출판사인 민음사출판그룹의 박맹호(78) 회장이 11일 자서전 (민음사 발행)을 내고 서울 광화문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박 회장은 작고한 정진숙(을유문화사) 조상원(현암사) 한만년(일조각) 등 1세대 출판인들의 뒤를 이어 국내 출판산업의 기틀을 다진 주역의 한 사람이다.
박 회장은 간담회를 시작하기 앞서 기자들을 향해 "해피 뉴 이어"라고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연로한데다 수년 전 간 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건강관리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지만 지금도 매일 서울 신사동 민음사 사옥에 출근해 일을 챙길 정도로 건강한 편이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바로 "일을 쉰다는 것은 고문이어서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자서전은 물론 박 회장 개인의 인생사와 그가 세운 민음사라는 한 출판사의 역사를 담은 것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60년 가까이 국내 문학ㆍ출판계가 걸어온 길의 축소판이나 다름 없다. 한국 출판계에서 '박맹호'의 존재감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책은 그를 문학청년으로 이끌었던 책들과의 만남, 단편소설로 한국일보 제1회 신춘문예에 사실상 당선되고도 당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낙선된 뒤 소설가의 꿈을 접고 출판을 시작한 사연을 담고 있다. 고은과 의기투합해 쌓은 우정, 김현 김치수씨 등 '문학과 지성' 그룹과 함께 시집 열풍을 불러온 이야기, 정병규씨를 채용해 국내 북디자인의 새 장을 열어 보인 일, 이문열 한수산 박영한 강석경 하일지 등 작가와 김용옥 최창조 이강숙 등 학자들과의 인연도 소개돼 있다.
1980년대 김경희(지식산업사) 김언호(한길사) 이기웅(열화당)씨와 함께 '수요회'를 결성해 출판문화운동에 나선 이야기며 이후 대한출판문화협회 회장 선거에 나섰다가 중앙정보부 방해로 낙선한 뒤 세무조사를 받아 출판사가 존폐의 기로에 섰던 비화도 공개했다.
박 회장은 "마거릿 미첼의 등의 여러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이라는 것이 천재가 쓰는 거구나 하는 절망을 느꼈다"며 "능력을 간파하고 과감하게 소설가를 포기한 것이 지금도 살아오면서 가장 잘 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세련된 책에 대한 한없는 갈증이 있었고 한국의 책을 명품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다"며 "좋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해서 세상과 만나게 하는 희열이 정말 컸다"고 돌이켰다.
요즘 출판산업에 대한 비관적인 목소리들이 많다는 질문에 박 회장은 1966년 민음사 첫 책 를 예로 들며 "그 책은 5,000부가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70, 80년대가 되면서 베스트셀러의 단위가 30만부, 100만부로 커졌다"며 "출판은 전반적인 산업 규모에 맞춰 성장했지 쇠퇴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지금도 독자를 고려한 책을 잘 만들어서 타이밍을 잘 노리면 출판업은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출판을 살리기 위해 완전 도서정가제를 실시하자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출판의 숨통을 막을 수 있다"며 반대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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