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부터 눈이 내리면서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보도가 있던 아침, 처리할 일이 있어 평소보다 이른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골목 저 끝 류가헌 한옥 대문 앞에 무언가 큰 보퉁이 같은 게 놓여있었다. 움직임이 없었다면,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채는 데 까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하감독님이었다. 더운 여름을 제외하고는 노상 입고 다니는 군청색 점퍼차림의 작은 몸이 잔뜩 웅크린 채여서 그리 보였던가보다. 하감독님은 대문 옆에 놓인 수도계량기 보호함 안에 팔을 뻗어 넣고 계셨다. 수도관이 얼까봐 전에 넣어둔 낡은 스티로폼 대신 어디서 구해 왔는지 헌옷가지들을 넣는 중이셨다. 류가헌이 문을 연 이래 지나온 여러 번의 겨울 동안 한 번도 수도가 언 적이 없었던 것이, 저 분의 이런 아침 때문이었다는 걸 오늘에야 안다.
많은 사람들이 들고나는 공간인데다 택령 오래된 한옥 두 채가 연결된 류가헌은 집 구석구석 이런 저런 손 볼일이 많다. 그럴 때마다 수도며 화장실 수리, 페인트칠, 목공 등 각 분야별로 따로 연락을 취하기가 성가시더니, 어느 날 주변에 사는 선배 언니가 하감독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건축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하감독님은 공사 현장감독을 지내던 시절의 직함을 그대로 쓰고 있었는데, 나이가 든 지금은 공사라기보다는 주택의 고장 수리 등의 일을 도맡아 하셨다.
하긴 여름 장마철에도 오늘과 비슷한 모습을 뵌 적이 있다. 갑자기 이른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져서 그날도 출근을 서둘렀는데, 류가헌 입구 골목에서 하감독님이 하수구 덮개를 벗겨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빗물받이 홈통에 낙엽이 쌓이면 기와에 비가 스민다고 지붕에 올라가있기도 했다. 직접 전화해서 부른 경우가 아니면, 그런 날은 대가도 마다하셨다. 마치 농부가 제 논에 무연히 나가보듯, 그렇게 온다간다 말도 없이 들여다보고는 가는 것이다.'나이 드시니 일이 많지 않아 저리하지' 하고 눙치기에는 그 잔영이 오래 남는다.
물론 이런 저런 고장이 나서 수리가 필요할 때 전화를 걸면, 늦은 시간에라도 꼭 낡은 공구가방을 매고 오신다. 공구도 많이 든 것 같지 않은데 가방을 맨 어깨가 유난히 올라간 것을 보면, 어깨에 훨씬 더 무거운 것을 지던 젊은 시절 버릇이 그대로 이어진 듯 했다. 이제 힘이 달리는지 콘크리트용 전동 드릴을 쓸 때는 날이 헛나가기도 하고 끙끙 낮은 신음소리를 낸다.
그럴 때는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나이 든 분께 몹쓸 짓을 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래도 어딘가 고장만 났다 하면, 어김없이 핸드폰 연락처의 하감독님을 누른다. 수리뿐인가. 하감독님이 아니었다면 수도가 얼었을 것이고, 빗물이 넘쳤을 것이다. 일상의 고장들을 그분이 예방해서, 그 나날의 흐름이 순조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따끈한 차 한 잔을 내고는, 오늘은 오래도록 떠올리기만 한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하감독님의 함자를 여쭌 것이다.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때마다, 선배로부터 연락처를 건네받던 당시 호칭 그대로 입력되어있는 '하감독님'을 온전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는 번번이 잊었다. 선배에게 전화해서 물어본 적도 있었지만, 수년째 하감독님께 집을 의지하고 있는 그이도 이름은 모르겠다고 했다.
처음 듣는 하감독님의 이름은, 그러나 귀에 익었다. 한자씩 또박또박 말하시곤 쑥스러운 낯빛으로 "은행 이름이랑 같아서, 사람들이 한번 들으면 안 잊어버려요." 하셨다. 그래, 못 잊을 이름이구나. 이름을 알고 나자, 한결 유정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화번호부에 성과 직함만 적힌 명단들이 여럿 더 눈에 띈다. 거래하는 인쇄소에 담당 과장은 00인쇄 박과장, 책을 유통하는 회사의 담당 직원은 00유통 나대리. 용달차 고씨아저씨라고 적힌 명칭도 있다.
연말이면 핸드폰 전화번호부에서 오래 연락하지 않고 지낸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한다는데, 올해는 이 분들의 함자나 제대로 기록해야겠다. 결국 내년도 '이름도 모르는' 이 분들이 고쳐주고 받쳐주어, 또 나날들을 이어갈 것이므로.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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