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지식사회의 최고 화제의 인물은 한 늙은 시인이었다. 그는 상당히 비논리적인 이유로 여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직후, 자신의 옛 동지이며 존경 받는 '원로' 한 사람을 마구 공격하였다. 이 공격 또한 논리의 범위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어 사람들을 매우 민망하게 만들었다.
혹자들은 그 시인의 변모를 변절이나 전향 같은 개념으로 해석하려 했다. 하지만 변절은 지극히 봉건적인 개념이고, 전향은 존재의 실존적 위기국면에서 행해지는 정치적ㆍ사상적 선택이니, 해당 사항 없는 듯하다. 전두엽 뇌세포의 경화와 호르몬 기능의 변화와 불균형으로 인해, 판단력이 전반적으로 약해지고 언어가 빈곤해진다. 반복된 외로움은 높은 경지의 수양과 고고(孤高) 대신, 오히려 존재를 독단과 무성찰의 상태로 내몬다. 이는 일반적인 노화의 과정일지 모른다. 그런데 타인들을 모두 몽매자로 몰고, 시적인 언어는커녕 극우들이나 쓰는 거친 비유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시인의 경우는 평균을 넘는 수준인 것으로 사료된다. 세월은, 한때 범접할 수 없이 뛰어난 언어와 불굴의 강건한 정신의 소유자조차, 무지하고 평범한 노인네의 그것과 방불하게 만든 것이다. 어제 또다른 자리에서도 시인이 화제에 올랐다. 처음의 충격과는 달리 며칠 사이에 시인은 웃음거리나 농담의 소재가 되어 있었다. 시인 개인과 그가 속한 세대 전체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어느 나이쯤 가장 현명하고 균형감 있는 존재로 되는가. 나이 들고도 윤리적이면서 지혜로운 존재일 수 있는 건 언제까진가. 독일의 인지학자 우르술라 스타우딩거는, 인간의 지혜는 20대 중반 이후에는 절로 증가하지 않으며, 끝없이 새로운 것과 접촉하는 소통력과 개방적 학습능력을 갖고 있어야 늙어도 '지혜'가 증대될 수 있다고 했다. 즉 늙음과 지혜는 어느 시점 이상이 되면 서로 역함수관계에 놓인다는 뜻이겠다. 노화와 우경화의 사회문화적 관계에 대해서도 실로 다대한 논의와 치료가 필요할 것이다. 의학ㆍ정치학ㆍ문화학ㆍ심리학자가 참여하는 학제간 탐구가 필요하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퇴락하는 것은 육신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숙명이다. 대개의 인간은 지적ㆍ정신적으로도 쇠퇴를 거듭하다 결국 사망한다. 늙어 몰락하다 죽게 인간을 설계한 신을 원망하고 싶다. 시인처럼 한때 아름다웠던 존재의 슬픈 노쇠와 전락은 '잘 늙기'야말로 노령화사회의 최대ㆍ최고의 개인적ㆍ사회적 과제임을 역설해준다. 노추는 실로 남의 일이 아니다.
잘 늙기 위해 우선 개인적 차원의 과제가 있다. 사실 노추라는 단어는 너무나 두렵고 선명한 개념이지 않은가. 이 개념에 비춰 '자기'라는 모호한 현상을 쉼 없이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노추의 전단계에는 반드시 '꼰대' 단계가 놓여 있을 것이다. 노추와 치명적 소외 이전에, 예방적 차원에서 '꼰대됨'에 대해 성찰해야겠다. 그런데 어느 수준 이상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언행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업데이트할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조력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친구가 아닌, 다른 젠더와 세대의 인간들에게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에게 의존하다간 극우 노인단체 회원들처럼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사회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몇 해 전 돌아가신 부친의 말년을 보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공상 비슷한 것을 했다. 특히 남자 노인들을 위한 재사회화 및 생존 능력 강화를 위한 상설 교육 기관과 정신적 복지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 1년에 2~3개월씩 입소해서 정치ㆍ사회ㆍ문화ㆍ경제 뿐 아니라 요리ㆍ빨래 등의 가사, 그리고 의사소통 및 감정표현 능력 등을 다시 교육받고 훈련하는 것이다. 물론 젠더와 가족관계에 관한 내용과 정기적으로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것도 프로그램에 필수이다. 그래야 거의 10%가 넘는 노인 자살도 줄이고 한국 민주주의도 공고해질듯 하다. 뭐든 집단으로 뭉치길 잘하는 386세대가 노인이 되면 이 공상은 현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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