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찬 여자와 평범남의 사랑
고래잡이의 딸 민현을 평생 사모한 세길의 진술 통해 산업화·민주화·환란 등 복기유쾌한 이야기꾼의 변신
해학·아이러니 대신 생경한 결말 "차기작으로 다큐같은 소설 구상"
유쾌한 이야기꾼 성석제(51)씨가 등단 후 첫 연애소설 (휴먼앤북스 발행)를 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처음 만난 한 여자를 평생 애틋하게 사모하는 남자의 입을 통해 작가는 1960년대 산업화 과정부터 가까운 미래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들려준다. 외모, 능력, 정의감까지 완벽히 갖춘 민현은 남성들이 꿈꾸는 판타지적인 여성. 그런 그녀와 평생토록 인연을 맺는 세길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자. 두 사람의 어긋나면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인연이 작가 특유의 걸출한 입담으로 펼쳐진다.
8일 홍대 근처에서 만난 작가는 "여자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제대로 쓸 수 없을 것 같았다"며 "그래서 여자를 잘 모르되 끈질긴 화자를 내세운 연애소설을 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야기의 배경은 2020년 바닷가 마을. 민현을 평생 사모해온 세길이 현재 자신의 연애와 과거 사연을 교차하는 방식으로 들려준다. 민현의 아버지는 작살 하나로 고래의 심장을 맞히는 고래잡이 목선의 포수. 제도와 관습을 밀치며 나아가는 민현을 세길은 초등학교 입학식 날부터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소설은 현대사 속에서 이들의 인연을 펼친다. 예컨대 세길이 포항으로 전학 가는 장면에서 포항제철 건설과 산업화 과정이, 민현과 세길의 대학생활에서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다시 이 둘의 사회생활에서 97년 IMF 금융위기가 슬쩍슬쩍 언급된다.
작가의 직ㆍ간접적 체험도 깨알같이 들어있다. 경남 구룡포에서 초고를 집필하며 그곳에서 보고 들은 고래잡이 목선과 포수 이야기, 일제 시대 지어진 일본식 2층집의 비화 등이다.
아버지의 고래잡이는 시간이 흘러 딸의 세대에서 새로운 일로 변모한다. 민현은 정치, 경제계의 거물(Big Fish)들의 뒷거래를 캐는 컨설턴트로 세계를 누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자칫 여성 영웅의 계몽적 소설로 읽힐 것 같다는 평에 작가는 "생경하게 읽히더라도, 의식적으로 넣은 부분"라고 말했다.
"그냥 그러고 싶어졌어요. 요즘은 보이지 않는 억압으로 사회 가치관이 다 해체됐다는 생각까지 들죠. 이런 걸 흔히 양극화라고 하지만, 저는 한 명에게 모든 자본이 몰리는 일극화라고 봅니다."
현대인의 판타지는 세길의 삶으로 구현된다. 고향에 정착한 세길은 스스로 농사지어 먹을 거리를 해결하고, 가끔 장보고 낚시하며 민현의 일을 돕는다. 작가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말한 자유인의 4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삶이다. 아침에 낚시 하고, 낮에 노동을 하고, 오후에 요리하며 저녁에 정치토론을 즐기는 것. 민현은 그런 세길을 가끔 찾아와 비밀 연애를 즐긴다. 성씨의 구수한 입담, 해학과 아이러니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경한 결말이다.
책 날개에는 30년 전 작가의 대학시절 장발의 사진이 들어있는데 작가는 "아름다운 대신에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그때 느낌을 되살려 보고 싶어서 이 사진을 골라 넣었다"고 말했다. 작가의 변모는 계속될 것 같다. 성씨는 "서사가 없이 묘사로만 된 소설을 생각해보고 있다. 형용사나 부사도 가능하면 배제하고,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7월 초 집필해서 두 달 만에 초고를 다 썼다. 데뷔 초 내가 소설을 쓰는 건지, 소설이 그냥 쓰이는 건지 구분이 안 갈 만큼 빨리, 많이 썼던 때가 있었는데, 이번 작품을 쓰면서도 그랬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