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헌 24권 통해 역사적인 순간으로 독자 안내조광조 죽음 회상 '근사록' 등 인격화 된 책이 화자로 등장
'…어리석은 자식이 아들을 얻어 가풍을 잇게 했네/ 지하에 계신 선조의 영령들께서 많이 도와주시리니…' 16세기, 관료이자 학자였던 이문건이 손자의 탄생을 자축하며 지은 시의 일부다. 그는 자손과의 인연이 박했다. 아이들 대부분 천연두로 먼저 보냈고, 유일하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열병의 후유증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 아들이 장가를 들어 2대 독자를 낳았으니 말로 다 못할 기쁨이다. 숙길이라 이름 붙인 손자는 귀양살이하던 이문건에게 한 줄기 희망이자 낙이었다. 그가 조선시대의 유일한 손자 육아일기 '양아록'의 저자가 된 배경이다.
조선시대 역사적 인물의 삶의 한 토막으로 들어가 조선시대에 쓰여진 책을 재구성하는 은 참신하다. 격주간 출판전문저널 '기획회의'에 연재했던 글을 묶어낸 것으로 24권의 조선시대 수필과 시, 소설 등은 각각 1부 '책, 사람을 읽다'와 2부 '사람, 책을 읽다'로 나뉘어 소개된다. 1부에는 인격화한 책이 '나'라는 화자로 등장하고 2부에선 저자의 결정적 한 순간이 상상력과 버무려져 책의 탄생배경과 그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특히 1부는 고전에서 영감을 얻은 독자와의 관계까지 담아내고 있어 더 흥미롭다. 독자 역시 역사 속 인물이다.
중국 송나라 신유학의 생활과 학문 지침서인 '근사록'은 조광조가 중종에게 사약을 받는 날을 회상한다. '근사록'은 중종반정을 일으킨 조광조가 중종에게 일독을 권했을 정도로 중히 여기던 책이다. '근사록'은 급진적 개혁으로 하루아침에 중종에게 내침을 당한 조광조를 이렇게 평한다. "어린 제자에게 타이르는 듯한 그 느끼한 말투에는 사람들의 기이한 행태에 익숙해진 나조차도 어깨를 움츠릴 지경이었다."(15쪽)
허난설헌이 지은 시를 모아 동생 허균이 펴낸 '난설헌시집'을 애독하는 이는 중국으로 귀화한 조선시대 통역관의 딸 허경란이다. 허난설헌을 흠모해 자신의 호를 소(小)설헌이라고 지었던 그는 결국 '난설헌시집'의 부록 '경란집'을 펴내기에 이른다. 허균은 누나의 싯구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에 "우리 누님이 스물일곱에 세상을 떠났으니 스물일곱 송이의 꽃이 떨어진다는 말이 징험이 되었다"는 평을 남겼는데, 허경란은 스물일곱 살 생일에 자신도 마치 죽을 것 마냥 뜨거운 열병을 앓는다.
독자는 조선시대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독일의 소설가 그리멜스하우젠은 네덜란드 선원이었던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서 자신의 소설에 넣을 '코레아'의 이미지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1653년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 표류해 14년간 억류되었던 경험을 써낸 '하멜 표류기'와 그 책을 읽는 독일 소설가의 눈으로 조선을 들여다 보는 재미는 의외로 쏠쏠하다.
이인선기자 kell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