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의 사람, 이야기]광주트라우마센터장 강용주
그의 삶을 돌이키면 ‘저항’이란 두 글자가 오롯이 떠오른다. 학살과 고문 등 영혼을 짓밟는 국가폭력에 맞서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싸워온 사람. 지난 10월 문을 연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이끌고 있는 강용주(50) 센터장 얘기다.
1980년 5월의 핏빛 항쟁에 뛰어들었던 고3 소년은 27일 새벽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도청이 함락되는 순간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는 “영혼에 쨍 하고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1년여의 방황 끝에 82년 전남대 의대 진학한 뒤 학생운동의 선봉에 섰고, 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는 끝내 전향을 거부해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14년을 복역했다. 출소 후 의대에 복학해 10년 만에 전문의를 따고 ‘동네의사’의 꿈을 이뤘지만, 그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보안관찰법이란 이름의 또 다른 폭력에 맞서 싸우는 한편, 고문 생존자들과 함께 만든 재단법인 ‘진실의 힘’을 통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치유를 돕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문과 학살은 생존자들의 영혼을 죽는 날까지 그 날 그 자리에 가둬버리는 끔찍한 범죄다.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우리 사회는 너무 소홀했다.” 지난 4일 밤 서울 연건동 ‘진실의 힘’ 사무실에서 만난 강 센터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광주항쟁과 고문을 다룬 영화 ‘26년’과 ‘남영동1985’에 쏟아지는 사회적 관심도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대선 국면을 의식한 반짝 조명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얼마 전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26년’ 시사회를 열었는데, 반응이 어땠나.
5ㆍ18 관련자와 가족 200여명이 오셨는데, 다들 위로를 받았다고 하셨다. 학살자 전두환이 떵떵거리며 사는 꼴을 봐 온 이들의 심정이 어땠겠나. 전두환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다시 자기들을 죽이러 오는 악몽까지 꾼다. 전두환의 육사 사열 소식이 전해진 날엔 다들 분노와 공포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영화가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희생자 자녀들이 직접 복수에 나서는 영화 속 이야기가 공동체 차원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한 현실과 겹쳐지며 아픔도 느껴야 했다.
-‘남영동1985’은 봤나.
보지 않았다. 정지영 감독이 제작 과정에서 ‘진실의 힘’ 고문치유 프로그램을 참관하고 피해자들 인터뷰를 했는데, 나는 인터뷰도 사양했다. 고문의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좀더 은유와 상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사회에 다녀온 ‘진실의 힘’ 선생님들이 우리가 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면서도 많이 힘들었다고 하시더라. 고문 생존자들은 고문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정신적 외상을 입게 된다.
좀 다른 얘기지만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고문조작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도 문제가 많았다.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사무실에 책상 하나 달랑 놓고… 고문취조실과 똑같은 환경에 피해자를 밀어 넣고 상처를 헤집는 게 얼마나 야만적인 일인지 전혀 인식이 없었다는 얘기다.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에서 이름만 따왔지, 우리보다 앞서 과거청산을 한 여러 나라들의 경험과 체계적인 프로그램은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거다.
-제대로 된 과거청산의 핵심은 무엇인가.
희생자의 관점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내 얘기가 아니라, 유엔의 인권침해 특별보고관 테오 반 보벤의 보고서에 나오는 말이다. 그는 “과거청산을 하면서 희생자의 고통이나 아픔을 도외시하거나 주변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았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아공, 칠레 등에서는 고문 생존자들이 조사 과정에서 2차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조사관들을 철저히 교육하는 한편, 조사관들이 입게 될 ‘참여외상’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인 심리상담을 했다. 또 ‘고문방지협약’은 피해자들에게 배상뿐 아니라 ‘가능한 한 완전한 재활’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도록 했고, 세계 70여개국에서 200곳이 넘는 국가폭력 희생자 치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진실규명 단계서부터 희생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결여됐을 뿐 아니라, 기념관은 지으면서도 치유센터 하나 만들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청산 작업을 했다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을 중심에 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물질주의 과거청산’이었다고 비판한다.
-겪어보지 않은 이들이 고문이 남긴 트라우마가 어떤 것인지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고문은 영혼에 죽음을 새겨 넣는 행위다. 고문을 견뎠다, 이겨냈다? 그건 고문이 아니다. 한 인간을 근본에서부터 철저히 망가뜨려 굴복하게 만드는 게 고문이다.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 40여일간 고문을 당하면서 나는 저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개가 됐다. 구타 당하다가 노래를 부르라면 부르고, 濚爛?얘기를 하라면 ‘DDD=두환이 대가리 돌대가리’같은 당시 캠퍼스에 떠돌던 우스갯소리를 해야 했다. 이 사건을 다룬 1시간짜리 특집 프로그램을 촬영하러 온 MBC 카메라 앞에서, 두들겨 맞으며 외운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영혼 깊숙이 새겨진 그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전향서를 썼더라면 더 빨리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고문의 상처를 안고서 끝내 전향과 준법서약서 쓰기를 거부하며 투쟁할 수 있었던 힘은 뭐였나.
남산에서 서울구치소로 옮긴 뒤 어느 날 갑자기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학살자 전두환 정권이 시키는 대로 TV에 나와 주절거린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재판을 받으면서 ‘고문에 의한 조작’을 주장하며 싸웠다. 검사가 반성을 안 한다며 사형을 구형하더라. 학생운동 한 죄밖에 없는데 사형이라고? 헛웃음이 났다. 검사에게 ‘엿 먹어라!’ 하며 주먹질을 해대다 배석판사가 흘끔 보길래 얼른 내렸다. 내 명줄이 달렸으니까.(웃음) 대전교도소로 이감돼 20, 30년 넘게 복역한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고서야 두려움이 몰려왔다. 밤마다 이불 뒤집어 쓰고 울면서도,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린 내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결심은 버릴 수 없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 견디다 못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다짐했다.
-99년 출소 당시 “봐라, 내 힘으로 싸워 이겼다”고 소리치고 싶었겠다.
‘이제 나는 세상에 빚이 없다’는 생각은 들었다. 80년 5월 총을 든 것도, 학생운동을 한 것도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믿지만 내가 원해서 간 길은 아니지 않나. 감옥에서 싸운 걸로 역사가 내게 지운 책무는 다했다, 앞으론 내가 원하는 대로 살 것이고 내겐 그럴 권리가 있다 싶었다. 오랜 기간 불의한 국가권력과 싸우며 상처투성이가 된 심신을 추스르고 세상에 연착륙할 시간이 필요했다. ‘최연소 비전향 장기수’로 상종가를 치던 때라(웃음) 강연 요청이 쇄도했지만 석방을 위해 애써준 딱 두 곳에만 갔다.
-그 해 가을 의대에 복학했는데, 다 늙어 공부하느라 고생 많았겠다.
개업한 선배와 동료가 학비와 생활비를 대줬고, 함께 공부한 98학번 후배들도 필기 노트를 빌려주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 300명 들어가는 계단식 강의실에서 교수님 침 튀기는 앞자리를 고정석처럼 맡아놓고 졸아도 거기서 졸며 공부했다. 어떤 교수님은 ‘절대 안 봐준다. 제대로 올라가나 보자’고 하셨는데, 다행히 유급 없이 5년 만에 졸업했다.
그는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2008년 가정의학 전문의가 됐다. 꼬박 9년을 고생했으니 1년쯤 안식년을 갖겠다 작정했지만, 오래 놀 팔자는 아니었다. 민가협에서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고문치유 모임’을 만들자 그도 힘을 보탰다. “양심수도 재야단체, 학생운동 등 출신에 따라 계급이 있는데, 조작간첩은 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불가촉 천민’이다. 신념을 갖고 운동하다 잡혀온 게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80년대 중반 학생운동 했던 나도 간첩사건 연루자라고 인권변호사들이 외면했는데, 납북어부 등 힘없는 분들이 겪은 설움은 오죽했겠나.” 치유모임에 참여했던 조작간첩 피해자들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고 배상금의 일부를 추렴해 2009년 ‘진실의 힘’을 설립했다. 매달 한차례 ‘오늘의 주인공’을 모시고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내는 ‘마이데이-맘풀이’ 등을 통해 서로를 보듬고, 치유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쌍용차 해고노동자 지원모임 ‘와락’ 등을 찾아 연대 활동을 하고 있다.
-고문치유 프로그램의 핵심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한 환경에서 반복적인 노출’이고 이를 위해 신뢰적 동맹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치유의 중심은 고문 생존자이고 치유의 힘도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치료자는 ‘내가 고쳐줄게’가 아니라, 생존자가 가진 치유의 힘이 온전히 발휘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아가 집단치료에서는 생존자들이 서로 치유의 힘을 주고 받을 수 있게 이끌어줘야 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내면의 상처를 더 이상 드러낼 것이 없을 때까지 되풀이해 얘기해야 비로소 치유된다. 마음에 담아둔 천 개의 돌을 하나씩 들어냄으로써 고문의 기억, 감옥의 기억에 대해 차츰 거리두기가 가능해지고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유엔이 정한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에 맞춰 인권상 시상식을 여는 것도 인상적이다.
유엔은 고문방지협약이 발효된 6월 26일을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로 정해 매년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98년 첫 기념일에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오늘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 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고 말했다. 그 뜻을 기려 지난해 진실의 힘 인권상을 제정했고, 올해 2회 수상자는 고 김근태 의원이었다. 2008년 국내에서 첫 기념행怜?열리던 날, 뒤에 앉아 내내 우셨던 고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고문 피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화해와 용서란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올린다. 화해와 용서를 말하려면 정의의 실현, 즉 진실규명과 가해자 처벌이 전제돼야 한다. 그 다음에 피해자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가해자의 ‘필연적 의무’이지만, 용서와 화해는 피해자의 ‘선택적 권리’다. 의무와 권리를 동등하게 봐서는 안 된다. ‘밀양’이란 영화에서 보듯 정의실현 없는 용서, 화해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프로포폴 우유주사 같은 마약이고 환각이다.
그는 2009년 5월 서울 중랑구 면목동 동부시장 안에 개인병원을 열었다. 이름이 재미나다. 아나파의원. “수련의 동기로 1년 먼저 대전에서 개업한 친구의 병원 이름인데, 너무 좋아 베껴 썼다.(웃음) 통증클리닉도 운영하는데 거기에도 딱 맞는다.” 자칭 타칭 ‘면목동 명의’가 된 사연도 흥미롭다. “세상물정 모르는 내가 병원을 연다니 다들 말렸다. 개원하고도 하도 걱정들을 하길래 우스개로 ‘걱정 마. 면목동에 명의가 났다고 소문 쫙 났으니까’ 했는데, 나중엔 자기들끼리 ‘저 녀석 걱정 말래. 명의래’ 하더라.(웃음) 환자 대부분이 어르신들인데 ‘이 변두리에 명의가 온 걸 영광으로 아시라’고 농담도 한다.” 광주트라우마센터가 개소하면서 매주 수요일엔 병원 문을 닫고 광주로 향한다.
-광주트라우마센터는 어떻게 운영되나.
원래는 보건복지부와 광주시가 예산을 절반씩 투자해 3년짜리 광역정신보건 시범사업을 시작한 건데, 강운태 광주시장이 지역특화사업으로 트라우마센터를 넣었다. 나는 1주일에 하루만 가고 임상심리 전문가, 간호사, 사회복지사, 연구직 등 10명의 직원이 상근하는데, 비정규 계약직이다 보니 어려움이 많다. 지속성과 독립성 확보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현재 5ㆍ18구속부상자 8명이 참여한 집단상담과 네 가족을 대상으로 한 가족치료, 유가족 어르신들을 위한 원예치료, 주1회 정신과전문의의 개인 상담, 통증 치료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내년에는 명상법의 일종인 ‘아우토겐 트레이닝’, 사이코 드라마, 꿈 치료, 사진 치료 등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려 한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보니 국가폭력으로 인한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공동체의 지지와 격려, 위로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폭력의 심각성을 널리 알리고 고문이 다시 발행하지 않도록 국내외 단체들과 교류 협력하고 교육하는 활동도 전개할 계획이다.
-광주항쟁 이후 32년 만에 치유센터가 생긴 건데, 어깨가 무겁겠다.
5ㆍ18 관련법에 따른 보상자 4,200여명 가운데 2,200명 가량이 광주에 산다. 이중 기초생활보호대상자가 48%, 차상위 계층까지 포함하면 70%에 달한다. 또 항쟁 이후 후유장애 사망자 400여명 중 자살자가 46명이나 된다. 외상 후 장애에 사회적 소외, 경제적 빈곤 등 삼중 사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제가 광주에 가서 그랬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상처투성이가 된 여러분 가슴에 달린 녹슨 훈장을 깨끗하게 닦아서 빛이 나도록 해드리고 싶다고. 광주항쟁 이후 32년 만에, 98년 민주정부가 들어서고도 15년이 지나서야 치유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고통 받은 희생자, 사람을 중심에 두지 않은 껍데기 과거청산이 이들을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광주항쟁의 상징적 존재이자 고문 피해 당사자였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교체를 이룬 뒤에도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이 더 안타깝겠다.
지난 민주정부 10년은 가해자에 대한 불처벌을 묵시적 전제로 한 우회적 청산에 그쳤다. 당시의 세력 관계 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더라도 옳은 선택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스페인이나 칠레, 아르헨티나 등에서는 민주화가 진전되며 과거청산의 폭과 강도가 확대됐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는 점이다. 집단배상이 대부분인 외국과 달리 재심과 무죄를 전제로 개별 배상만 하는 것도 잘못이다. 예컨대 유신체제 하 긴급조치는 국가의 이름을 빌린 폭력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피해자들에게 개별 배상을 한다는 것은 고문과 불법연행 등만 문제 삼고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자체는 합리화해주는 꼴이다. DJ 내란음모사건이 제일 먼저 무죄 받고, 그 다음은 방귀깨나 끼는 운동권 인사들이 받는 ‘낙수 효과’식 과거청산도 문제였다. 가장 힘 없고 가장 고통 받은 이들부터 챙겼어야 한다. 힘 있는 유명인사부터 수혜를 받는다면 뒤집어진 유신 체제, 전도된 전두환 체제와 다름없지 않나.
-앞으로도 더 강도 높은 과거청산이 이뤄지긴 어려워 보인다.
분단체제가 족쇄가 되고 있는데, 정상사회로 가려면 그런 제약을 뛰어넘어 보편의 관점에 서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맨날 글로벌 스탠다드 운운하면서 왜 가장 중요한 인권 문제에서는 국제기준을 외면하는가. 김구 선생의 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이냐 사도이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해야 한다. 비록 구절양장이라도 그것이 정도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하는 것이고 진실로 이것만이 사람이 갈 길이니 여기에서 현실적이니 비현실적이니 하는 것은 문제 외의 문제이다.” 현실을 핑계 삼아 원칙을 외면하는 이들에게 딱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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