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후보 간의 텔레비전 토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그동안의 사례를 보면 반드시 말을 잘한다고 해서 토론의 승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어눌한 말투의 조순 후보가 되려 진정성 있어 보인다며 점수를 땄고,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이명박 후보나 작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박원순 후보도 정동영 후보나 나경원 후보를 말로 이기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 토론을 준비하는 각 캠프에서도 말의 내용보다는 후보의 이미지에 더 신경을 쓴다.
5일에 있었던 텔레비전 토론도 예외가 아니었다. 토론 이후 각 당의 총평은 대개 "침착했다", "안정적이었다", "균형감을 보였다" 등의 정서적 평가였다. 오바마와 롬니 간의 텔레비전 토론에서는 정책과 쟁점을 놓고 첨예한 공방을 벌였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청자들에게 형식이나 외양보다는 내용을 새겨 듣자며 가르치려 드는 것도 우습다. 인상을 보고 호감을 느낀다는 사람에게 뭐라 할 수 없고, 사실 유권자들이 꼭 공약만 보고 투표하는 것은 아닌게 엄연한 현실 아닌가.
그럼 굳이 왜 토론을 하는가? 시청자(유권자)를 설득시키기 위해서이다. 설득은 논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궤변론자라 불리는 소피스트는 (궤변으로라도)남을 '설득'시킬 수 있다면 가치 있는 언술이 된다고 생각했고, 이를 공격했던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활용해서 '진리'를 드러내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와 '설득'을 둘 다 받아들여 을 내놓았다. 진리와 정의를 가짜와 부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말의 기술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논리(logos), 감정(pathos), 성상(ethos)이라는 핵심어를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화자는 "가급적 많은 사실을 정확히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충분한 팩트를 토대로 삼고", "진리를 밝히고 전한다는 목적으로", "논리와 정서에 호소하여"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 이것이 레토릭의 뼈대가 된다. 토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토론의 출발은 팩트여야 한다. 5일의 토론에서, 한 후보가 말하면 다른 후보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하는 장면이 종종 있었다. 둘 중 하나는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며, 이는 레토릭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도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총선 때 야권연대를 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합의했다고 발언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고 애국가도 안 부른다고 한 말은 그 자리에서 반박당했다. 비록 이정희 후보의 날 선 비판 때문에 박 후보에 대한 동정적 지지가 늘었다는 분석도 있으나,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획득한 지지는 떳떳할 수 없다.
팩트에 기반하되 정의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는 아마도 각 후보의 정치적 신념에 관한 경구가 될 것이다. 토론대회를 볼 때마다 불편한 이유는 참가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찬반 중 한 관점을 강제로 부여받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신념과 상이한 주장을 논리적으로 잘 포장하여 토론한다면 소피스트와 다를 바 없다. 문제는 후보의 말이 후보 자신의 진정한 신념에서 나오는지 판단하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라는 점이다.
팩트와 정의가 전제된 이후에야 비로소 논리와 정서라는 설득수단을 따져볼 수 있다. 케네디와 닉슨의 토론에서 토론을 "들은" 라디오 청취자는 닉슨이, "본" 텔레비전 시청자는 케네디가 토론의 승자였다고 판단한 것은 표정과 제스처 같은 시각적 이미지의 효과 때문이었다. 이정희 후보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해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다수 유권자의 정서와 맞지 않은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텔레비전 토론이 논술고사처럼 될 필요는 없다. 눈물이나 미소도 효과적인 설득수단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단, 설득의 기술 이전에, '팩트'와 '신념'은 분명히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잘못된 사실관계를 근거로 주장을 하거나 자신의 신념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시청자를 설득하고자 한다면, 논리냐 감성이냐 따지기에 앞서 이미 토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태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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