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나 듣는 첫 거짓말은 어떤 내용일까. "엄마, 아기는 어떻게 생겨요?"란 급 질문에 당황해 던지는 엄마의 답변 아닐까. "아빠가 아기씨를 엄마에게 주면 엄마가 아기집에서 열 달 키우는 거야." "엄마, 그럼 아빠가 아기씨를 어떻게 줘요?" 이쯤 되면 절대 사랑인 모자 관계에서도 거짓말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아이와 엄마 사이에 첫 비밀이 생기는 것이다.
'너와 나 사이에 비밀이 있었다니, 우리 10년 우정이 이 정도였니.' 비밀이 있는 관계는 결함이 있는 양 치부되기 일쑤다. 그러나 상상해보라. 서로의 속마음, 모든 비밀이 노출된 상황을. 오히려 관계가 유지되기 어렵다. 우리 모두가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은 관계 유지를 위한 스스로의 방어이자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착한 거짓말은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들이다. 끝없이 비밀을 캐는 정신병리의 뒤쪽엔 완벽주의와 함께 존재하는 불안이 있다. 연애시절 사랑의 표현인가보다 넘겨버린 남편의 비밀에 대한 집착적인 수사. 의처증 남편은 결혼 후 아내의 삶을 좌절과 분노로 가득 차게 한다. 비밀이 없는 것이 성숙한 관계라는 착각이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네티즌 수사대의 활약이 대단하다. 요즘 세상엔 비밀이 없다. 우리의 관음증 욕구를 채우는 비즈니스가 인터넷과 방송에 가득하다. 노출된 비밀을 역으로 비즈니스에 활용하는 '노이즈 마케팅'도 이미 일반화한 기법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비밀에 집착할까.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마르셀 고세는 현대인의 '투명성에 대한 집착'을 '세상에 대한 환멸'이라 했다. 현실 세계에 따뜻한 위로와 만족이 없기에 비밀 수사대처럼 비밀을 캐는 것에서 오히려 하나됨의 동질감,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의 환상에 빠지는 모양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엉망으로 비밀이 파헤쳐질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깊은 고독과 허무뿐이다.
필자에게 멋진 선배가 하나 있으니, 25년이 넘는 세월, 디테일에 대한 질문이 없다. "형, 저 오늘 약속 옮겨야 해요." "오케이." 다 알려 하지 않지만 한결 같은 우정을 보여주는 그 선배, 항상 든든한 내 감성의 지원자이다. 열심히 산만큼 행복하다는 생각은 반만 옳다. 성과와 성취에는 분석과 디테일이 중요하다 그 결과물을 향유하고 즐기는 감성엔 엉성함으로 이뤄진 비밀금고가 꼭 필요하다. 그 안에서 꿈 그리고 환상이 삶의 행복과 만족을 가져온다.
비밀이란 비극적인 요소로 가득한 현실 세상에서 나의 마음을 지켜주는 보호막이다. 남과 비교하는 삶에 비밀은 존재하기 힘들다. 피곤할 따름이다. 내 행복은 내 비밀 안에서 지켜지는 매우 주관적인 감성이다.
(다음 주부터는 한진우 인산한의원장의 칼럼이 시작됩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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