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반한 B 급 문화
'강남스타일' 세계적 인기 영향
한국 대중문화 인지도 부쩍 상승
유명 아티스트가 패러디까지
한국 영화의 힘
박찬욱 '올드보이' 김기덕 '봄 여름…' 등
2000년대 중반 소개 후 대중들 관심
객석 점유율 80%… 일부 매진 사례
존재 알렸지만 갈 길 먼
접근매체 유튜브·블로그 등 한계
마니아 영역 머물고 상품 구매 미미
#1. 지난달 11일 밤 배우 류승룡은 영국 런던 도심의 레체스터광장 오데온극장 앞에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출연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폐막작으로 상영된 제7회 런던한국영화제 폐막식 행사를 모두 마친 뒤였다. 광장 앞을 지나가던 20대 후반의 영국 여성 두 명이 류승룡에게 다가왔다. 두 여성은 "당신을 TV드라마('개인의 취향')에서 본 적이 있다. 이민호와 함께 출연하지 않았냐"며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2. 지난 3일 런던 도심의 문화공간 ICA는 영화 시작에 앞서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패러디한 2분50초짜리 영상물 '자유를 위한 강남'(Gangnam for Freedom)을 상영했다. 영국의 유명 미술가 아니시 카푸어가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 지지를 위해 만든 이 영상물은 현대무용계의 이단아 아크람 칸이 안무를 맡고, 영국 국립발레단의 스타 발레리나 타마라 로호가 '섹시 레이디'로 출연했다. ICA는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최신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곳으로 런던의 고급문화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유럽에서도 한류는 거침없다. 최근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유럽인들의 흥을 한껏 돋우면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인지도도 부쩍 상승하고 있다. 런던 도심에서 취객이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말춤을 추고, 대낮 길거리에서 영국 소녀가 '오! 섹시 레이디~'를 외친다. 한국 공포영화 시리즈 '여고괴담'에 반해 자신의 팔에 한글로 큼지막하게 '여고괴담'이라는 문신을 새긴 영국 청년을 만날 수도 있다. 어눌한 발음의 한국어로 말을 거는 영국 젊은이와 마주칠 기회도 늘었다. 최근 유럽에 상륙한 한류 열풍이 연출해낸 현상들이다.
영국 내 한류의 씨앗은 한국영화가 뿌렸다. 박찬욱 김기덕 봉준호 김지운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이 2000년대 중반부터 영국에 소개되며 한국 대중문화의 존재를 알렸다. 아직도 많은 영국인들이 한국에서 왔다고 말하면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종종 입에 올린다.
영화를 통해 조금씩 영국 대중들을 파고 들던 한류는 2010년 후반부터 K팝을 앞세워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지난해 11월 샤이니가 런던한국영화제 개막행사에서의 공연으로 영국 언론의 조명을 받은 뒤 K팝은 급속도로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 '강남스타일'로 지난 10월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한 싸이의 세계적인 인기 때문에 K팝이 언론에 다시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선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주영한국문화원도 K팝의 인기를 발판 삼아 한국문화 보급에 나서고 있다. 올 초 K팝에 열광하는 영국 청소년 30명을 대상으로 한 'K팝 아카데미'를 개설해 12주 동안 역사와 영화 미술 등 한국문화를 폭넓게 알리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혜정 주영한국문화원 사업총괄팀장은 "K팝은 충성도 강한 젊은 층을 팬으로 두고 있고, 젊은 층은 다른 세대로 한류를 전달할 강한 파급력도 지니고 있다"며 "이들이 한국학을 전공하거나 한국 유학을 생각할 수 있도록 행사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영국인들의 늘어나는 호감도는 런던한국영화제에서도 체감할 수 있다. 올해 상영된 40편의 영화 중 5편이 매진됐고, 나머지 영화들도 80%가량의 객석점유율을 기록했다. 지난해까지 대관료를 다 지불하는 조건으로 극장을 빌려줬던 영국 최대 극장 체인 오데온은 내년부터 티켓 수익을 나눠가는 내용으로 계약 방식을 변경했다. 관객들이 꾸준히 증가하고 런던한국영화제가 안정적인 수익이 기대되는 행사가 됐다는 방증이다.
싸이가 영국 싱글차트 1위까지 기록했다지만 한류가 영국 주류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하다. K팝을 촉매제 삼아 한류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으나 한국 대중문화는 여전히 마니아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K팝 팬들은 주로 유튜브나 블로그 등을 통해 한국 대중음악을 접하고 있으며 그들의 활동이 음반이나 음원의 적극적인 구입으로 이어지진 않고 있다. 영국 주요 음반매장에서 K팝 CD를 구하기는 여전히 쉽지 않다. 한국영화의 영화 개봉 편수도 1년에 2,3편 정도다.
유럽은 한국 등 아시아영화를 주로 예술영화 위주로 소비하는데 박찬욱 김기덕 감독 등을 이을 한국영화의 차세대가 보이지 않는 점도 한류 확산의 걸림돌이다. 전혜정 팀장은 "영국 안의 한류 현상은 뚜렷한데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기는 매우 힘들다"며 "새로운 영화감독을 꾸준히 소개하고 K팝을 매개로 한류를 지속시키는데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런던=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공동기획:한국일보사·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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