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서울 보라매병원 응급실. 뇌사 판정을 받은 최은대(35)씨의 어머니 황모(58)씨가 아들의 장기기증 서류에 사인했다. 늘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둘째 아들이었다. 최씨는 25년 전, 술만 마시면 때리는 남편을 피해 도망치듯 집을 나온 엄마를 지독히도 미워했다. 황씨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내가 만나자고 했지만 은대는 계속 나를 피했다"며 말끝을 흐렸다. 황씨 대신 친엄마처럼 최씨를 키웠던 신정찬 성민보육원 원장이 "(장기기증을 하면) 은대가 살아 있는 것과 똑같은 게 아니냐"며 울기만 하는 황씨를 토닥거렸다. 최씨는 간, 신장, 각막 등 5군데의 장기를 기증하고 4일 영면했다.
최씨는 지난 1987년 겨울, 형과 함께 경남의 한 보육원에 맡겨졌다. 몸을 다쳐 일자리를 잃은 최씨 아버지가 술만 들어가면 어김없이 아내인 황씨와 아이들을 때렸다. 참다 못한 황씨는 결국 가출했고 보육원에 맡겨진 최씨는 23세가 되던 해까지 보육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아이들과 매일 싸우는 게 일이었다. 열등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축구를 하고 운동을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재미있어 하는 일도 생겼다. 컴퓨터였다. 보육원의 지원을 받아 국립대인 경상대 정보통신공학과도 졸업했다. 졸업 후, 프리랜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버젓이 취업을 한 최씨는 보육원 동생들에게 믿음직스러운 형이었다. 신 원장은 "5~6년 전 내 차를 바꾸라고 5,000만원을 들고 왔길래 '나중에 장가 갈 때 쓰라'며 돌려보냈다"고 했다. 적은 액수였지만 매달 보육원에다 꼬박꼬박 기부도 했다. 1년에 보육원도 6~7차례 찾았다.
하지만 '받은 만큼 베풀면서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최씨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씨는 지난달 25일 오전 6시쯤 서울 신림동 신림역 5번 출구 근처에서 술에 취한 이모(34)씨의 주먹에 머리를 맞고 길가에 쓰러졌다. 보육원 친구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신 후 신림동 집으로 들어가던 길이었다. 행인의 신고로 급히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출혈로 곧 뇌사 상태에 빠졌다. 신 원장은 "이제야 자기 길을 제대로 찾은 것 같았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다"며 "그래도 마지막까지 7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갔으니 은대도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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