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연한 사랑 이야기다. 달달한 커피믹스 같은 시덥지 않은 사랑 영화들에 질려있던 차에, 진득한 에스프레소 한잔을 머금은 듯한, 간만에 진한 사랑을 마주할 수 있어 반가운 영화다.
2차대전이 배경인 '리멤버'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러브스토리다. 1944년 폴란드의 나치 수용소에서 폴란드인 토마스(마테츠 다미에키)와 유대인인 한나(앨리스 드바이어)는 뜨겁고 강렬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수용소의 잔혹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탈출을 계획하던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나와 함께 극적으로 도망쳐 나온다. 그들은 토마스의 고향까지 함께 왔지만 결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 서로를 잃고 만다. 그 후 30년 뒤 뉴욕에서 안락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리게 된 한나(다그마 만젤)는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첫사랑이자 생명의 은인인 토마스(레흐 마키위츠)를 보게 된다.
'리멤버'는 독일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가해자인 독일 입장이 아닌 정반대의 시선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한다. 여성감독인 안나 저스티스의 섬세한 표현력이 운명적 사랑을 더욱 밀도 있게 그려냈다.
흑백영화를 보듯 잿빛 가득한 스크린은 시종일관 숨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한다. 숨겨 놓은 빵을 나누며 수용소의 감시망을 피해 시작된 토마스와 한나의 사랑은 그렇게 숨막히듯 이어진다.
영화의 독일어 원제는 'Die verlorene zeit'. 직역하면 '잃어버린 시간'이다. 30년후 토마스의 생존을 확인한 순간부터 한나는 예전 사랑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현재와 과거 사이에서 격한 갈등에 시달리는 한스는 전화로 토마스의 음성을 확인한 뒤 오열한다. "죽었다고 여겼다는 게 가장 큰 실수야"라고 울부짖은 그는 남편에게 "날 잡고 놔주지 않는 기억 때문에 힘들다. 그가 살아있는 것을 보고 나야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며 보내달라고 한다.
토마스의 어머니(수잔느 로다) 연기도 눈에 오래 밟힌다. 아들과 자신의 안전을 위해 유대인 며느리를 독일군에 넘기려는 순간, 그의 손끝, 눈빛의 떨림은 영화를 더욱 깊은 갈등으로 몰아 넣는다.
이 영화가 말하는 기억은 그저 비릿한 첫사랑의 추억이 아니다. 전쟁 속 짧지만 강한 사랑을 평생 간직한 두 사람은 추억 만으로도 사랑은 계속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사랑은 그렇게 질기고 질긴 것이라고. 13일 개봉. 15세 이상.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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