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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빛과 소리가 되어…" 장애 딛고 21㎞ 희망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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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빛과 소리가 되어…" 장애 딛고 21㎞ 희망 레이스

입력
2012.12.0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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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마저도 피부에 닿아 땀으로 바뀔 정도의 습한 새벽. 30도를 넘는 기온에도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수 만 명의 마라톤 주자들이 밀집해 있는 싱가포르의 도심 한 가운데에 두 한국인 남성이 손을 잡고 서 있다.

"내가 손을 꽉 잡으면 출발 신호니까 우리 힘껏 달려보자." "선생님, 달리다가 목 마르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중간 중간에 음료수 집어 드릴게요."

2일 오전(현지시간) 열린 2012 싱가포르 마라톤 대회 하프구간(21㎞)에 참가한 시각장애1급 노환걸(44)씨와 청각장애 3급 김재민(28)씨가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로를 격려했다. 서로의 눈과 귀가 돼 주겠다며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은 마치 부자지간 같았다.

이들은 지난 9월 에쓰오일이 주최하고 한국장애인재활협회(회장 이상철)가 주관해 장애인들에게 국제마라톤 대회 출전기회를 제공하는 '감동의 마라톤'프로그램에 4대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사실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시력을 잃은 노씨와, 보청기에 의지해도 사람의 입 모양을 봐야 하는 김씨에게 마라톤은 뜻하지 않게 다가와 그들을 보듬었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절망'이라는 단어를 24시간 몸으로 느끼며 살았어요." 국내 대기업에서 10여 년을 근무하며 촉망 받았던 노씨는 5년 전 눈이 침침해 지더니 결국 2년 전엔 전맹(全盲) 판정을 받고 어둠 속에 갇혔다. 다니던 직장도 그만 둬야 했던 그에게 하루하루는 칠흑보다 컴컴했다. 노씨는 "TV나 지하철에서만 종종 보던 시각장애인 처지가 됐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 지팡이를 들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세상과의 끈을 놓고 싶어 급기야 지난해 가을 서울 남산을 찾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노씨는 "전화위복이라고 남산에서 제2의 삶을 얻어서 내려왔다"고 했다. 여기서 자동차 진입이 금지된 남산 북쪽 순환로 3.3㎞ 구간을 매주 뛰는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클럽(VMK) 회원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들도 마라톤을 통해 밝게 사는 모습에 그는 자신의 태도를 고쳐야겠다고 다짐했다.

키 178㎝, 몸무게 74㎏의 다부진 체격의 김씨 역시 5살 때 귀 수술을 받던 중 발생한 의료사고 이후 청력을 잃었다. 그는 "소리가 안 들려 말이 어눌하다 보니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누구보다 운동을 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후 운동마니아가 됐다. 그는 현재 서울북부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청소년 장애학생을 대상으로 축구, 수영 등 생활체육을 가르치며 자신과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 후배들에게 '희망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 김씨는 "운동을 좋아하지만 마라톤은 올 봄부터 처음 시작했다"며 "쉽지 않겠지만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외국에서 펼쳐지는 국제 마라톤 대회인데다, 아직은 마라톤 초보인 두 사람. 혹시나 땀 때문에 손을 놓칠까 손목과 손목에는 노란 끈도 맺다.

"레디! 탕!" "하나 둘, 하나 둘"

총소리와 함께 서둘러 출발하는 주자들 틈에서도 두 사람은 구호를 먼저 외쳤다. 두 사람의 발이 땅에서 떨어질 때 마다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앞서나갔다. 하지만 서로의 눈과 귀가 돼 완주를 목표로 앞으로 나아갔다. 2시간41분16초. 대회 참가를 위해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작성했던 자신들의 최고기록보다 30여분이나 처졌지만 결승점을 통과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꼬옥 껴안았다. 김씨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반레이스를 펼칠 순 있지만 장애인끼리 힘을 모아 뭔가를 이뤘다는 기분에 앞으로는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기뻐했다.

이날 마라톤은 30여 나라에서 10㎞, 하프코스, 풀코스를 선택해 참여한 6만5,000여명의 주자들이 함께했다. 노씨와 김씨를 포함해 한국에서 온 20명의 장애인들도 이들 틈에서 모두 목표한 거리를 완주했다. 송대경 감동의 마라톤 단장은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듣지 못해도, 다리가 불편해도 그들이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며 "더 많은 장애인들이 대회를 통해 희망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싱가포르=김현빈기자 hb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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