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처음엔 자형보고 탄복… 대선 출마하며 사이 틀어져
한민당 사람들이 하도 흔들어 농림부 장관 1년도 못한 것
3대 민의원 선거 출마땐 괴한들에 등록서류 뺏기기도
재선위해 의원 버스 연행때도 거창학살 조사관 막을때도 자형이 앞장서서 항의
"교수형 당했다" 소식 듣고 찾아보니 두개골이 흐물흐물…
발인제는 커녕 울지도 못하게 해
죽산 조봉암(1899~1959)은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강화도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운동에 투신했고 공산당 운동에도 관여했으나 스탈린 체제가 다른 나라를 폭압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을 알고는 공산당과 손을 끊는다. 제헌의원을 거쳐 1948년 8월 농림부 장관이 되어 농지개혁을 실행했다. 농민에게는 땅값을 10년 동안 나눠 갚게 하고 지주에게는 채권을 주어 적산공장을 불하 받게 하는 방식은 가난한 농민들은 안정되게 땅을 갖고 살고 지주에게는 산업자본가가 될 길을 열어줌으로써 현재 대한민국이 공생하는 기틀이 된다. 국회부의장을 거쳐 1952년 대통령 후보로 나서 이승만을 위협하는 득표를 한다. 56년에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선 것이 독재자에게 밉보여 국가보안법에 따라 간첩누명을 쓰고 59년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됐다. 작년에야 이 판결은 잘못된 것이라는 재심판결을 받았다. 그가 54년에 쓴 라는 책을 보면 왜 북한독재는 위험한지 국민들은 행정 입법 사법부를 국민이 만든 것으로 어떻게 수호하고 지켜야 할 것인지를 설파해서 이런 대통령이 52년이나 56년에 나왔다면 한국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안타깝게 한다. 그의 처남으로 대선 때면 그를 경호했고 지금은 진해에 살고 있는 김영순(92)씨를 만났다.
_아흔셋인데도 건강하시네요.
"보청기 안쓰고 안경 안쓰고 신문도 봅니다. 술 담배 안하고 내 마음에 있는 건 후련하게 풀어버리니 마음이 편안해요."
_조봉암 선생을 처음 보신 때가 언제인가요?
"내가 열여섯살인가 경도(교토)중학교 4학년 때 동계(겨울)방학 때 고향인 진해 웅천으로 나오니까 인천 살던 누님(독립운동가 김조이 여사 1904~1950?)이 자형이랑 초등학교 4학년이던 딸 호정이를 데리고 찾아오셨어요. 누님이 나 어릴 때(1924년) 서울로 독립운동하러 떠나셨거든요. 우리집이 3남3녀인데 누님이 제일 큰 누이이고 큰 형과 작은 형은 인천에서 자형을 도와 왕겨 판매를 하고 있었어요. 그 때는 왕겨를 목재 대신에 연료로 많이 썼어요. 그러다가 다음 해에 학병으로 잡혀갈 위험이 있어서 나도 학교를 중단하고 온 가족이 다 인천으로 옮겨 갔어요."
_자형의 첫인상은 어땠어요?
"눈이 도끼처럼 찢어져 무서웠어요. 그런데도 누님은 항상 나를 보면 너도 자형처럼 눈을이렇게 빠릿빠릿하게 해라 그랬어요.(웃음) 말은 아주 인정스럽게 잘했어요. 나는 축구를 잘해서 여러 군데에 축구선수로 뛰었는데 영등포 경기염직에 축구선수로 뛰다가 일본놈이 차별을 하는 걸 보고 싸운 뒤 거길 나와서 인천에 있는 전중공업에서 축구선수로 뛰었거든요. 그때는 축구선수라고 축구만 하는 것은 아니고 일도 하고 주말이면 축구를 했어요. 자형은 도산동 시영주택이라고 임대주택에 살았는데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찾아가면 너는 참 못 하는 운동이 없다고 칭찬을 해줘요. 그 임대주택은 소방서 전망대보다 위에 있어서 공설운동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거든요. 누님은 아주 원칙주의자라 잘해줘도 무서워요. 자형이 나중에 국회부의장을 할 때인가 누님이 너는 부정을 못 보니까 경찰 무끼다, 자형한테 말해서 고향인 진해경찰서장이나 외가인 김해경찰서장으로 가라고 해요. 그래서 '누님 일제 시대에 내가 들은 소리지만 국민을 등쳐먹고 사는 사람이 경찰이랍니다. 내가 경찰서장 되어서 양담배나 얻어 피고 국민들 등쳐먹고 사는 일 하란 말입니까.' 그랬더니 누님이 당장 내려가라고 해서 고함소리가 커졌어요. 자형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내 편을 들어주면서 같이 있자고 했던 생각이 나요."
_자형의 일을 같이 하기도 했습니까.
"(1948년) 농림부 장관이 되었을 때 산하기관인 식량공사에 부정이 말도 못하게 심했어요. 거기 사장이 조규섭이라고 자형의 일가사람이었는데 자형이 그 사람을 몰래 불러서 처남이라는 사실은 알리지 못하게 하고 저를 거기 감사과에 넣었어요. 감사에는 정기감사 지도감사처럼 미리 알려주고 하는 감사가 있고 적발감사라고 해서 불시에 하는 감사가 있는데 몰래 가도 밝혀내질 못한단 말입니다. 그때 식량공사 자동차 부속이 자꾸 없어지니까 과장이 나를 계장 몰래 불렀어요.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여주엔가 있는 경기도 지사로 적발감사를 가라고요. 서울역 오른편에 자동차 부속가게가 많이 있었어요. 자동차 부속명칭을 공부해 갔지요. 가서 창고를 둘러보고 부속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챙겨보니까 장부 숫자하?안 맞아요. 지사장이 좋은 호텔로 가자는 것을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는 서울 직원을 불러서 적발감사를 성공했습니다. 지사장이 모가지가 날라갔어요."
_농림부 장관을 이승만 대통령 아래서 한 것을 보면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군요.
"자형이 인천에서 제헌의회 의원이 됐는데 제일 먼저 발언권을 얻어서 조리있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이승만이 탄복을 한 거라요. 인물이라고 칭찬을 하게 잡지에도 실렸어요. 대통령 출마를 하면서 사이가 나빠졌지요. 그때부터 테러 위험도 있고 해서 자형이 다니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여관방 복도에서도 자고 그랬어요. 시라소니 이성순(이승만 시절의 협객)의 몇 촌 형이 동국대 빙상선수라는 인연으로 알게 되어서 시라소니도 형님을 지켜줬습니다. 얼굴은 찌그러져 있고 뱀보듯 징그러운 인상인데 정말 날래고 의리가 대단했습니다. "
_실제로 테러를 당하기도 했습니까?
"3대 민의원 선거(1954년)에서 제가 대신 부산진 을구에 등록하러 갔는데 노상에 괴한들이 나타나 등록서류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럴 줄 알고 가짜 서류를 바깥 주머니에 넣었던 것이라 안주머니에 감춰둔 진짜 서류를 들고 선거사무소에 등록하러 갔더니 서류는 다 받고 접수증을 못 주겠대요. 선거관리위원들이 회의를 해야 한다고. 다다음날 갔더니 추천인이 모자라서 등록이 안 된다고 해요. 자료를 빼돌린 거지요. 자형은 자형대로 서대문 을구에 본인이 갔는데 결국 등록을 못했어요."
_농림부 장관은 6개월 정도 하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농지개혁을 성공한 거에요?
"자형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농지국장 하는 신도성씨 같은 사람이 밤을 새가면서 함께 만든 것이지요. 나는 운동을 한 사람이라 자형이 농지개혁을 얼마나 잘했는지는 잘 몰라요. 국회의원들이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켜 줘야 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을 서소문 농림부 장관 관사에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한 생각은 나요. 누님이 웅천서 모내기 할 때 부르는 노래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가르쳐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불렀어요."
_누님인 김조이 여사는 납북되어서 소식이 끊겼지요?
"자형이 국회부의장이라 한강다리가 끊기기 전에 같이 피난을 갈 수 있었는데 그때 다른 여자가 낳아온 아들이 젖먹이일 때라 누님이 걔를 암죽을 끓여서 키우려고 명륜동에서 저희 어머니와 함께 살았어요. 장모와 마누라 딸 아들까지 모두 넷을 더 태워야 하고 비서와 자료까지 실어야 하니까 비서만 데리고 피난을 떠났어요. 7월초인가 먹을 게 없어서 자형의 큰조카하고 인천에서 보리쌀을 한 말 얻어서 등에 지고 명륜동 집에 왔더니 내무서에서 잡아가요. 갔더니 이미 누님과 생활비를 주러 온 큰형님까지 잡혀와 있더니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두 분을 한데 묶어 끌고 갔어요. 9.28 수복되자 자형이 곧바로 인천의 제가 다니는 회사 사택으로 와서 누님이 어찌 됐냐고 묻더니 그 길로 평양까지 찾으러 갔던 모양이라예. 결국에는 못 찾고 1.4 후퇴로 부산 피난 시절에는 매일 술로 괴로움을 달래는 걸 봤습니다."
_누님 소생은 하나도 없으니 자형한테 인간적으로 서운한 점은 없으세요?
"딸 셋에 아들이 하나인데 누님이 낳은 아이는 하나도 없어요. 그래도 맏딸인 호정이는 친자식처럼 누님이 키우고 아들인 규호는 결국 걔를 키우려다 납북이 됐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 자형이 참 플레이보이 잡놈이다 싶지만 공인으로는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없잖아요. 국회부의장을 할 때는 신익희 국회의장이 개원식 할 때나 나오고 잘 나오지 않았어요. 국회를 다 자형이 꾸려갔어요. 부산 피난 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하려고 야당 국회의원들을 버스로 다 실어갈 때도 신익희 의장은 꼼짝도 못했어요. 조봉암이 항의를 했지요. 거창양민학살 사건 때도 국회에서 조사관을 파견했는데 백두산 호랑이라 불리던 김종원 계엄사령관이 국회의원들 못 들어가게 부하들을 시켜 총으로 막았잖아요. 그게 국회에서 탄로가 나서 엄상섭 서민호 의원이 자형의 지명을 받아 발언하면서 '백두산 호랑이인지 아미산 쥐새끼인지' 하고 욕을 했더니 자유당의 국방위원장인 김종해가 서민호 의원한테 말을 막해요. 서민호 의원이 김종해를 한대 쳤는데 저는 그때 국회 의사국 직원이니까 싸움은 말려야 안합니까. 그런데 때리는 서민호 의원을 안 잡고 맞는 김종해 의원만 붙들어 잡아서 말렸습니다. 싸움 말리는 것도 요령이 있어야 합니다. (웃음)"
_조봉암 선생이 돌아가시던 것은 보셨나요?
"자형이 잡혀갈 때 나도 마산으로 잡혀 갔다가 서울의 특무대까지 끌려가서 석달을 조사 받고 나왔어요. 간첩사건이랑 아무리 엮을라 그래도 엮이나. 진해 웅천으로 돌아왔는데 이발은 부산 가서 했거든요. 어느 날 부산의 이발사가 웅천을 찾아왔어요. '조봉암이 교수형으로 죽었다'는 호외가 났다고 그걸 들고 왔어요. 내가 그 길로 부산으로 가면 형사들이 잡겠다 槁底?구포역으로 갔어요. 기차를 타고 약수동 집으로 갔더니 사복형사들이 골목마다 있어요. 작은형이랑 서대문 형무소에 갔더니 담뱃대 넣는 상자로 관을 만들었어요. 윤길중이가 장택상이한테 가서 돈 200원인가 얻어서 관목 사고 수의도 사고 그래 했어요. 작은형이 입관시키려 들어갔는데 수의를 갈아입히면서 보니까 두개골이 흐물흐물하더랍니다. 교수형은 목을 달아매 죽이는데 살아날까 봐 머리를…두 번 죽인 거지요. 발인제도 못하고 영구차에 싣고 가면서 울지도 못하게 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고 평토제를 지내려고 하니까 형사들이 발로 쓸어서 지내지도 못하게 해요. 삼우제때 갔더니 뱀을 묶어 얼굴에 들이대고. 우는 자유조차 없었습니다."
_일본에 전시헌금을 냈다고 독립운동 공적도 인정을 못 받고 있다고요.
"자형이 150원을 전쟁헌금으로 냈다고 매일신보에 실렸다는데 자형이 무슨 여유가 있어서 돈을 냅니까. 내가 자형이나 누이한테 용돈을 얻어본 적이 없어요. 내가 갖다 드렸지. 해방되기 직전 겨울에 인천 도산동 집을 찾아갔더니 자형은 없고 누나가 잡고 막 울어요. 자형이 계속 요시찰인물이었는데 일제 단속에 잡혀 갔다고, 이제 못보게 됐다고. 그때야 그렇게 해방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해방되고 다음날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니까 인천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인산인해를 이뤘더라고요. 자형이 풀려난다는 말을 듣고 환영인파가 나온 거예요. 형이 그렇게 존경을 받으니까 일제가 선전자료로 쓰려고 가짜로 광고를 만들었을 수는 있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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