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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교차해도 믿기지 않을 평온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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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교차해도 믿기지 않을 평온함이…

입력
2012.11.3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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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보셔야 할 분들이 있다면 지금 부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26일 오전 7시50분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 13층 호스피스 병동. 회생이 어려운 환자들을위한 병실이라고 하지만 일반 병실과 시설이나 분위기가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회진을 하던 가정의학과 김영성 교수는 닷새 전 호스피스병동으로 온 간세포암 말기환자 김진호(가명ㆍ56)씨 보호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준비'를 할 때가 왔음을 알렸다. 김씨가 숨을 내뱉을 때마다 거칠게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오후 들어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김씨는 이날 저녁 안정실(임종실)로 옮겨진 후 가족들의 기도 속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다음날 오전 2시에는 구강암으로 투병 중이던 백성현(가명ㆍ51)씨가 임종을 맞이했다. 백씨는 전날 오후부터 자꾸 침대를 벗어나려 하고 바닥에 주저앉는 등 선망증세(큰 수술을 받거나 주변 환경이 급변했을 때 일시적으로 인지력이 떨어지면서 보이는 이상행동)를 보이다 혈압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숨을 거뒀다. 암으로 인해 턱 근육 및 뼈 손상이 심해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못한 채 외로움에 굶주렸던 그에게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들은 매일 찾아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빌어줬다. 가족이라고는 동생 내외가 전부인 그의 장례식은 따로 치르지 않기로 했다. 해마다 약 300여명에 가까운 환자들의 마지막을 보게 된다는 김 교수는 "병동에 오신분들 중 열에 여섯 분 정도는 본인에게 남은 시간을 받아들인다"며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환자의 통증을 줄이고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돕는 일"이라고 말했다.

응급 상황을 제외한 호스피스 병동의 일과시간은 삶과 죽음의 그림자가 수시로 엇갈리는 곳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2호 병실에 향긋한 로즈마리 향기와 함께 구슬픈 노래 가락이 울려 퍼졌다. 간암 말기 환자인 박재중(가명ㆍ64)씨가 봉사자들로부터 아로마 발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전날부터 계속된 금식으로 예민해진 박씨의 표정이 노수연(59) 봉사자의 노래 가락에 맞춰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제 18번이 '여자의 일생'인데 한 곡 더 불러 드릴까요?" 노씨의 말에 박씨는 "내 일생도 이런데 여자 일생은 무슨…"하고 픽 웃는다. 노씨가 "가족들한테 늘 무뚝뚝하셨다면서요. 사랑한다 한마디는 해 주셔야죠"라고 권하자 박씨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침대 옆에서 아버지의 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있던 막내딸은 눈시울을 붉히며 자리를 떴다. 함께 마사지를 돕던 김정숙(56) 봉사자는 "죽음이란 꽃상여 타고 하늘나라로 이사 가는 것 아니겠나. 우리는 그 길에 징검다리라고 생각한다"며 "봉사자들의 인도로 환자와 가족이 '내 남편ㆍ부인이 돼줘 고맙다, 미안했다, 사랑한다' 이 한마디 나누는 모습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옆 병실에서는 폐암으로 5년째 투병해 온 옥치백(63)씨가 침대에 앉아 종이 접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초록색 색종이가 서서히 저고리의 형상을 갖춰갔다. 옆에 나란히 앉은 아내는 남편이 접은 저고리를 미리 만들어 둔 치마와 함께 종이에 풀로 붙였다. "종이를 접고 있으면 잡념도 사라진다"고 말하는 그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집보다 이곳 병동이 훨씬 좋다는 옥씨는 "집에 있을 땐 내가 조그만 소리라도 내면 밥을 하다가도 집사람이 사색이 돼서 달려 오는 거야. 너무 미안했지"라면서 "몸이 아파 잠이 안 오면 바둑 채널을 틀어 두고 밤을 꼬박 새운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 간호사, 의사 선생님들처럼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니까 참 좋다. 다른 분들도 잘 마무리 했으면 좋겠어"고 말했다. 종이 접기를 잠시 쉰 그는 창 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며 흐뭇해했다.

병동 간호를 총괄하는 이윤미 수간호사는 평안을 찾아 가는 환자들을 보며 뿌듯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족한 병동시설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이 병원은 전체 745병상 중 호스피스 병상이 12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호스피스 병동은 대개 고가의 치료나 검사를 하지 않아 수익이 잘 나지 않는 반면 일반 병동보다 많은 전문 간호사가 필요해 운영이 쉽지 않다"며 "가능한 오래 머물고 싶어하는 환자들도 많지만 위급상황이 지나면 퇴원이나 요양병원으로의 이동을 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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