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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래 나 골초다! 자학 개그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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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래 나 골초다! 자학 개그의 맛

입력
2012.11.2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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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지간히 ‘개그콘서트’를 즐겨보는 국민의 일원이다. 그걸 챙겨 보야야 하는 이유 가운데엔 어영부영 몇 주 건너뛰었다간 눈 뜬 소경이 되기 십상인 탓도 있다. 물론 대중문화가 언어의 생태를 좌지우지할 만큼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야 상식이지만, 개콘 만한 위력을 가진 것도 없을 것이다. 단지 몇 주 개콘을 걸렀단 이유로 말귀가 어두워져 눈만 끔벅대는 처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 별난 한국 사회의 단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요즘 개콘에서 가장 큰 인기몰이를 하는 코너는 단연 ‘네 가지’일 것이다. ‘여배우들’과 짝을 이루는 이 신종 ‘자학 개그’는 통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보는 이를 시원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자신의 열등함 혹은 그들의 말을 빌자면 ‘없는’ 것, 갖지 못한 것을 당당하게 밝히고 그게 뭐 그리 대수냐고 역설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통쾌한 기분이 없지 않다. “누굴 진짜 돼지로 아나! 오해하지마라. 마음만은 홀쭉하다”고 을러대는 개그맨의 호통은 후련하다. 그렇지만 ‘네 가지’의 인기를 가능케 한 세태를 생각하면 그리 마음이 가볍지 만은 않는 노릇이다. 우리가 자학 개그에 열렬히 호응하기까지엔 그만한 찝찝한 사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

짐작컨대, 자학개그의 재미는 부족한 것을 가진 자들이 느끼는 주눅든 심정을 속 시원하게 해소해 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키 높이 깔창을 신고 다녀야 하는 단신의 사내의 눈치이든, 시골 출신이라 아무래도 사투리에 신경 써야 하는 촌놈의 눈치이든, 눈칫밥을 먹고 살던 이가 외려 당당한 체하는 장면은 보는 이를 짜릿하게 해준다. 굳이 내가 그런 처지가 아닌데도 개그맨들의 넉살좋은 입심에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따져본다면 그것은 아마 자신을 득달하면서 살아가게 만드는 세태에 대한 반동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자기를 키우고 다듬어 가는데 열중하든, 설령 그런 매뉴얼은 거들떠도 본 적이 없어도 스펙을 관리하고 연봉을 올릴 방안을 궁리하든, 이 모두는 ‘자기’라고 불리는 것을 현명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우리 시대의 윤리적인 명령과 상관이 있을지 모른다.

자기관리라고 부르는 이 윤리적인 협박은, 물론 그에 서툰 이들을 향한 혐오와 원망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찌질하다”란 말 자체가 암시하듯 어느새 달갑지 않은 사람은 자기관리에 허술한 인물로 바뀌고 말았다. 낯빛 좋고 몸 좋고 매너 좋은 사람은 물론 그럴 만큼 열심히 노력을 한 사람이란 대접을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보았을 때 건네는 말이 “자기관리 열심히 하였네요”란 걸 우린 이미 알고 있다. 자기관리의 윤리가 최고의 윤리로 자리 잡았을 때, 그 윤리적 자세는 당연히 규탄해야 할 적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자기관리라는 윤리적 덕성을 위반한 못난 자들의 역은 누가 떠맡아야 할까. 그 자리를 맡을 최고의 후보는 단연 뚱보와 흡연자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관용과 배려를 으뜸으로 치는 세계에서 은밀하게 그리고 음험하게 창궐하는 이러한 혐오와 환멸은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무능한 자를 향해 흘러들어간다. 뚱보가 왜 환멸스런 사람일까. 비만한 사람이 아름답지도 성적인 매력도 없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뚱보와 흡연자는 자기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인물의 전형인 셈이기 때문이다. 뻔히 건강을 해칠 것을 알면서 극구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야말로 너무나 역력히 자기관리의 윤리를 위반하는 악인 아닐까. 그런 탓에 송구한 낯빛으로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빨다 보면, “그래, 나는 골초다”라고 어깃장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 고개를 쳐들지 않을 수 없다. 실은 자학개그의 주인공들은 ‘네 가지’가 아니라 ‘다섯 가지’여야 옳을 지도 모른다. 자기도 제대로 못 가누는 찌질한 윤리적 패배자의 이름, 골초를 덧붙여서 말이다.

서동진 계원예대 인문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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