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당신과 함께한 19년 행복했습니다, 굿바이 찬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19년 행복했습니다, 굿바이 찬호

입력
2012.11.29 11:59
0 0

야구 팬들이 새벽 잠을 설쳐가며 TV 앞에 모여드는 시절이 있었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에 두 번 선발 투수 박찬호(39)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곳에서나 대화 주제가 '박찬호'였던 시절이었다. 미국 땅에서 덩치 큰 외국 타자들을 삼진으로 잡는 모습에 국민들은 열광했다.

처음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당시 대학 특급 선발 투수로 유명했던 임선동(연세대)과 조성민(고려대)에 비하면 이름값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찬호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시속 150㎞ 중반대의 빠른 광속구.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정상급 투수로 성장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4~95년까지는 주로 마이너리그에 머물렀지만 96년부터 본격적인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당당히 마운드에 섰다. 주심을 향해 모자를 벗어 인사하는 모습은 아직도 야구 팬들 가슴 깊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97년부터는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와 선의의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승승장구 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 해 14승8패(3.38), 1998년 15승9패(3.71) 등 5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거두며 '국민 영웅'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박찬호는 2000년 한 시즌 최다 승수인 18승(10패)을 올리기도 했다.

최고의 전성기를 달린 박찬호는 곧 돈방석에 앉았다. 2001년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뒤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무려 6,500만 달러로 계약한 것이다. 하지만 인생 최고의 시기에 허리 부상이라는 악재가 찾아왔다. 광속구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 중 하나인 허리가 아파오자 전성기처럼 위력적인 공을 뿌리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일부 야구 팬들은 '먹튀'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박찬호는 다시 일어섰다. 2005년 샌디에이고로 팀을 옮겨 통산 100승 고지를 밟았고 뉴욕 메츠, 다저스, 뉴욕 양키스, 피츠버그 등으로 팀을 옮기며 계속해서 기록을 써갔다. 이 과정에서 선발이 아닌 불펜으로 보직을 옮기며 제 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하기도 했다.

아시아 출신 선수 최다승 기록은 야구에 대한 열정과 투혼,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자칫 소속 팀 없이 시즌을 마쳐야 할 위기에까지 몰렸던 박찬호는 2010년 피츠버그 유니폼을 입었고, 그 해 10월2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 구원승을 거두며 역사적인 개인 통산 124승째를 챙겼다. 마침내 박찬호가 '위대한 투수'로서 이정표를 만들었다.

함태수기자 hts7@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