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선의가 이토록 무참하게 짓밟혀도 되는 건가. 제발 그러지 말자. 선의를 가진 사람이 그 선의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다소간 실수가 있었다한들 그의 선의조차 불의한 것으로 낙인찍어야 하는 건가. 참 너무한 일이다. 실수를 트집 잡아 마녀사냥에 나선다면 그것 역시 불의에 가깝다.
한국일보 11월23일자'삶과 문화'에 실린 김소연 시인의'의자놀이와 현시창'제목의 칼럼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그 시인은 어인 연유로 이런 글을 쓰는 걸까? 대체 공지영은 무슨 거악을 저질렀기에 이리로 집요한 인신공격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
칼럼의 내용을 살펴보자. 딴엔 일군의 작가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했었다는 말로 글은 시작된다. 이어서 공지영의 와 임지선의 을 나란히 놓고는 정의와 불의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분법으로 공지영을 비판한다. "두 책의 정의로운 취지는 비슷하지만, 쓰여진 과정은 전혀 다르다. 한쪽은 거의 불의에 가깝고 한쪽은 냉철한 정의에 가깝다."
더 충격적인 건 이어지는 글이다. "공지영은 를 통해 면죄부를 갖고 한결 당당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정의를 실천했다는 착각은 갖고 있지 않기를 바래본다. 정의를 자처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약자를 외면하는 일, 약자를 수단으로 삼는 일, 정의에 잠시 발을 담그고 면죄부를 두 손에 꼭 쥔 채 쉽게 정의를 잠시 맛보는 일, 이 일은 안타깝게도 불의에 가깝다."
심하다. 아니, 심해도 너무 심하다. '불의에 가깝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종내 '가깝다'는 수식어를 떼어내고 그저 '불의'를 각인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느낌이다. 정말로 이리 말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자기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타인의 선의를 이토록 깔아뭉개도 되는 건가. 특히 "공지영이 를 통해 면죄부를 갖고 한결 당당해졌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어이가 없고 기가 차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좋다. 인정한다. 작가 공지영이 쌍용차 문제와 관련해서 성실한 취재와 충분한 이해`공감의 시간을 갖지도 못한 채 르포르타주 형식의 글을 쓴 것은 장르 선택에 문제가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런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면 얼마든지 이해가 되며, 그에 대한 비판이라면 뭐라 할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기로, 를 쓰기로 마음먹은 뒤 관련된 글들을 검색하고, 농성현장을 찾아 그들의 아픔을 위무하고, 함께 대화하고, 돌아와 책상에 앉아 남몰래 눈물 흘리며 땅 끝으로 꺼져 버릴 것 같은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을 다독여 가며 밤을 지새워 쓴 가 단지 작가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 소영웅주의에 빠져서, 자기만족적이고 이기적인 동정심의 발로였다고 단언하는 건 무리이다.
김 시인은 정말로 공지영의 수고를 그리 보는 걸까. 과정 중에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하면서 인용표시를 제대로 하지 않았고(그것도 출판사의 실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게 어느 무명 르포작가가 발로 쓴 글의 일부였다고 해서, 그렇기 때문에 공지영은 무조건 불의에 가깝고, 정의에 잠시 발을 담그고 면죄부를 두 손에 꼭 쥔 채 쉽게 정의를 맛보는 일을 했던 것일까.
한 사람의 선의를, 그것도 자기 입장과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사람을 이리 매몰차고 야박하게 몰아세워도 되는 일인가. 이러지 말자. 제발 이런 식의 미움과 증오의 춤판을 거둬치우자.
그래서 대체 뭘 얻겠다는 건가. 그리하여 마침내 을 그 불의로부터 온전히 분리해 내자는 걸까. 그건 차라리 을 욕보이는 일일 뿐이다. 시기심치곤 너무 졸렬한 시기심이고, 질투치곤 너무 폭력적이다. 누군가의 수고에 박수는 못 칠망정 그런 식의 졸렬한 시기심을 보이진 말자.
*이 글은 23일자 31면 '삶과 문화'에 대한 반론입니다.
최준영 거리의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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