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5월 조선총독부는 바다로 사면이 막힌 경기 안산시 선감도에 직영 감화원(感化院)인 선감학원을 세웠다. 고아라는 이유로 끌려온 무수한 아이들이 이곳에서 가혹행위에 시달렸고, 탈출을 시도하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2월 선감학원 관리는 경기도로 이관됐다. 우리 정부가 운영하며 가혹행위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일제강점기 못지 않은 인권유린이 자행됐다는 충격적인 폭로가 잇따르고 있다. 아직도 베일에 가려 있는 해방 후 선감학원. 그곳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지난 21일 오후 선감학원 자리에 세워진 경기창작센터 1층 세미나실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 7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선감학원 위령비 건립을 추진 중인 안산시 공무원들에게 "1960~70년대 선감학원 출신"이라고 밝혔다. 선감학원의 비극을 일제강점기에 국한시켰던 안산시 공무원들은 노신사들의 입에서 나오는 과거사에 흠칫했다.
선감학원 출신들에 따르면 군사정권 시절인 1960~70년대 거리를 떠돌던 아이들이 선감학원으로 끌려가 범법자 취급을 받으며 바다를 메워 염전을 만드는 등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이를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려다 조류에 휩쓸려 숨진 아이들이 부지기수였고, 일부는 상급생들의 성폭력에도 시달렸다.
60년대에는 400여 명이 선감학원에 수용됐지만 일제 당시처럼 이들을 끌고 간 법적 근거는 없었다. 부랑아들이 사회불안을 일으킨다는 군사정권의 명분 아래 구두닦이나 신문팔이 등이 주요 타깃이 됐다. 명목 상 선감학원은 국립 고아원이었지만 이들 중에는 부모나 보호자가 있는 아이들도 상당수 끌려갔다.
해방 후 선감학원의 참혹한 현실에 대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2010년 4월말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어린이 근로정신대를 아십니까'라는 주제의 선감학원 세미나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아이들이 탈출하려다 물때를 잘못 계산해 숨졌고, 일제강점기 사망자들이 매장된 야산 공동묘지에 같이 묻혔다"는 한 주민의 증언이 소개됐다.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장은 "일제강점기보다 해방 후 탈출하다 숨진 아이들이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며 "해방 후 집단매장지는 일제 때 공동묘지와 옆쪽의 야산, 선감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경기 화성시 마산포 일대였을 것"이라고 밝혔다.
면적 3.7㎢에 불과한 조그만 섬 선감도는 1988년 5월 대선ㆍ불도ㆍ탄도방조제가 생기며 육지와 연결됐다. 선감학원은 폐쇄공간이란 이점이 사라지기 전인 82년 없어졌지만, 청소년 학대에 대한 조사는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이뤄지지 않았다. 선감학원 출신들 역시 부끄러운 과거로 여기며 수십 년 동안 함구해왔다.
하지만 이제 60대에 접어든 선감학원 출신 30여 명은 최근 모임을 만들어 과거 자료를 수집하는 등 진상규명을 준비 중이다. 이 모임 관계자는 "결혼을 해 자녀를 키우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이들이 스스로 선감학원 출신이라고 밝히기는 어려웠다"며 "다시 있어서는 안될 인권유린의 현장, 선감학원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회원들이 증언이나 자료를 모아 경기도 등에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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