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을 앞두고 유력 후보들이 모두 순환출자 금지를 공약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병이 깊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이 병을 고치려 하지 않고 진단서만 써놓고 치료는 나중으로 미루자는 것이 세 후보의 공통된 입장으로 보인다. 재벌들의 기존 순환출자는 그대로 두고 신규 순환출자만 금지하자는 것은 지금 앓고 있는 병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병이 생기는 것만 예방하자는 것이다. 이미 하고 있는 도둑질은 계속하게 놔두고 새로운 도둑의 개업은 막자는 것이다.
2004년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재벌들과 대화한 뒤 기존 순환출자에 대해 매년 10분의 1씩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의결권을 제한하는 법안을 2007년에 발의했던 필자는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법안 발의에 참여했던 14인 의원 중에는 최근 순환출자 문제에 대해 자신이 돕고 있는 후보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김종인씨도 포함되어 있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자유로운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의 10대 재벌은 우리 경제의 절반이상을 정당한 소유권도 없이 무단 점거한 채로 혁신을 가로막고 창의적 기업정신을 말살시키고 있다. 그 수단이 순환출자라는 봉이 김선달식 지배구조다. 재벌이 지배하는 경제에서는 스티브 잡스 같은 혁신적 기업가도 페이스북 같은 벤처기업도 생겨날 수 없다. 이대로 놔두면 우리나라는 동남아와 중남미 일부 나라들처럼 몇몇 집안이 경제를 지배하고 대다수 국민들은 이들의 머슴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개혁 없이 성장한 나라는 없다.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체질을 고치는 것이 개혁이다. 개혁의 속도는 조절할 수 있다. 부당한 의결권을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제한하자는 것이 급진적인 개혁인가? 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 경제의 미래는 어떻게 되든지 현실에 안주하자는 것 아닌가?
흔히들 경제가 어려운데 무슨 개혁이냐고 한다. 고칠 것을 미루다가 위기를 맞게 되면 그 때서야 개혁을 하게 되는 데, 경제가 추락한 뒤 개혁하려면 힘들고 무리가 간다. 우리나라는 이를 90년대말 외환위기 때 뼈저리게 경험했다. 지혜 있는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고 개혁한다.
또 왜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삼성전자, 현대차 같은 대기업을 건드느냐고 한다. 기업에 손을 대자는 게 아니고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처럼 많은 기업을 지배하는 재벌체제를 고치자는 것이다.
전경련에서는 순환출자 해소에 쓸 돈을 투자에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괴한 논리다. 순환출자 해소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단계적 의결권 제한에 돈이 들어가지 않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른바 순환출자 해소에 필요한 경비란 무단 점거하고 있는 기업들의 소유권을 확보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무단점거를 그만 두라고 했더니 우리 나라 경제 절반에 해당하는 기업들을 아예 소유할 돈을 내놓으라는 매화타령이다. 대표 재벌인 삼성그룹의 예를 들어보자.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지만 삼성창업자 일가의 지분은 삼성그룹 전체 주식의 1% 도 안 된다. 삼성전자 경영권 확보에도 부족한 지분이다.
회삿돈을 빼돌려 종잣돈을 만든 뒤 그룹 전체 경영권 승계를 도모한 에버랜드 사건도 순환출자를 밑그림으로 일어났다. 현대차그룹의 글로비스 사건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경제범죄를 저지르고 유죄 판결을 받은 범법자인 재벌총수들이 대통령보다 더 힘이 센 것이 이 나라 현실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도 벌써부터 이들의 논리에 굽히고 들어가는 모양새다.
이제는 순환출자를 고칠 때가 되었다. 한국경제도 이제 탐욕스런 재벌의 지배에서 벗어나 창의적 기업가들의 혁신을 동력으로 발전해야 한다.
채수찬 카이스트 경영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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