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설움과 강자의 탐욕이 기나 긴 시간동안 대치하는 자리얼기설기 엮은 채 한평의 천막 세상의 질서 벗어난 '고도' 느낌도시민들의 관심과 동조가 버팀목 "그래서 추위·외로움을 버틴다"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시리고
도와주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은 있지만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
내가 왜 세상에 농락당한 채 쌩쌩 달리는 차 소릴 들으며 잠을 자는지
내가 왜 세상에 버림받은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춥더라
임금삭감 제도 개선을 요구하며 2008년 12월 시작된 재능교육 노동조합(지부장 유명자) 농성이 이번 주(21일)로 만 5년이 됐다. 노래패 '꽃다지' 4집에 수록된 저 노래 '내가 왜?'는 농성자들이 거리 농성 1825일 중 어느 날 문득 느꼈을지 모를 마음의 한 자락을 담은 노래다. 노래를 들으며 그간의 사연들이 담긴 자료를 찾아 읽다가 충동적으로 농성장을 찾아간 게 지난 주말, 간간이 빗방울이 듣던 오후였다.
농성장은 낯익은 동료들의 믿음직한 연대 못지않게 낯선 시민들의 동조와 격려, 하다못해 우호적인 시선 한 줄기에도 뜨겁게 감응하는 공간이다. 벅찬 희망과 바닥 모를 절망감이 잔인하게 맥놀이하는 공간이고, 대치의 긴장이 상존하는 공간이다.
머무는 행위 자체가 시위의 형식이자 내용이 되는 농성은 주체나 현안의 성격 못지않게, 자리에 따라 격렬한 배수(背水)의 투쟁이 되기도 하고, 외형상 느긋하고 평화로운 대치가 되기도 한다. 가령 2009년 용산참사의 현장인 남일당은 철거민들의 생존의 희망이 내몰려간 마지막 자리이자 재개발 자본의 탐욕이 헐떡이며 내달아 오던, 우회할 곳 없는 길목이었다.
그들이 택한 길바닥은 집이나 작업장처럼 거점적ㆍ구심적 공간에서 떠밀려난 이들이 흔히 택하는, 원심적 공간이다. 공간 상징성을 덜 훼손하면서, 듣고 보아 줄 이들이 가장 많은 공간. 그런 자리에서의 농성의 양상은, 처지의 가파름이나 현안의 절박성과는 별개로, 공간 자체의 성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유순해진다. 즉 제 목숨을 걸 수는 있지만 세상의 질서나 편리를 심각하게 위협하지는 못한다. 설사 그 곳이 지상 20미터 높이의 칼바람 부는 철탑 위라고 해도, 현재 한국사회의 가장 첨예한 갈등- 부당해고, 비정규직 차별, 용산참사 진상규명, 제주 해군기지 반대 등- 이 상징적으로 대치되는 공간이라고 해도.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 인도 위에 선 세 동의 천막도 그런 공간이다. 스스로 '농성촌'이라고 명명했지만, 촌(村)이라는 이름조차 호기로워 보일 만큼 옹색한, 인도의 절반에 열 걸음 남짓에 불과한 거리 공간. 그리고 재능교육 농성장은 서울광장을 사이에 두고 그 농성촌을 마주보는 자리에 있었다. 스티로폼 위에 은박 매트를 깔고 얼기설기 묶어 세운 지지목 위로 두 겹 비닐을 두른, 한 평도 안 되는 그 천막은, 보행자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보도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농성장은 늘 비지 않는 공간이다. 유득규(46)씨는 걸레로 방(?)을 훔치는 중이었고, 다른 동료 농성자는 홑이불 같은 침낭으로 얼굴을 덮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사생활을 엿본 듯한 느낌에 머뭇거리는 기자에게 유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를 권했다. 밤낮없는 거리 소음과 어지간한 무례쯤엔 이골이 난 듯한, 한 데 생활 5년의 관록? 농성의 사연보다 공간 자체에 마음을 빼앗긴 채 두리번거리는 기자를 그는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뜯어보더니, 성실한 부동산 중개인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은 상태가 아주 좋은 편이죠. 1년쯤 전인가, 박원순 시장이 취임한 바로 다음날 중구청에서 철거를 한 뒤로는 지금껏 별 탈이 없었으니까요." 혜화동 본사 앞 농성시절부터 치면 강제 철거된 횟수가 공식적으로 센 것만 14차례. 철거되고 나면 한 동안은 맨바닥 농성을 하고, 경비가 조금씩 느슨해지면 돗자리 펴고, 침낭 펴고, 파라솔에 비닐 둘러치고…. "그렇게 하나씩 다시 갖춰가는 겁니다. 현재는 거의 안정화 단계죠."
정규직이던 학습지 교사가 1990년부터 개인사업자 격인 위탁계약자로 전환됐고, 이제는 학습지 교사 10만여 명이 모두 이른바 특수고용직이 된 이야기, 노동자 신분도 선명하게 보장받지 못하는 데다 직종 특성상 이직률은 높고 근속연수도 짧아 노동계조차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전국 방방곡곡 돌며 동료들을 모으고 파업까지 감행해가며 쟁취한 노조(1999년), 이후 더 집요해진 탄압과 2007년 임금 삭감, 그리고 농성….
지난 1일 행정법원은 학습지 교사도 회사의 지휘 감독을 받는 근로자임을 인정했다. 근로기준법 상의 근로자 권리는 인정받지 못해도 노동조합법상의 노동자 신분은 확인 받은 셈이고, 적어도 법적으로는 임금협상과 단체교섭의 주체가 됐다. "이제야 1999년의 처음 그 자리, 노조 설립필증을 받아 들고 기뻐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셈이죠." 그는 후보 시절 한 약속(노동자성 인정)을 못(안) 지킨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 사측의 부동노동행위에 대한 노동위원회의 숱한 기소의견에도 불구하고 근로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요지부동이던 사법당국, 해고노동자에 대한 대법원 복직 판결마저 비웃는 거대자본의 위세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공권력으로부터 얻어낸 첫 호의적인 반응이니까 기쁘긴 한데, 솔직히 정치인의 약속이나 법이 보장해준다는 권리에 큰 기대는 안 합니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우리의 주장에 동조해서 함께 나란히 서줄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시민들이에요."
그들의 농성은 단위사업장의 현안을 넘어 슬금슬금 늘어나고 있는 특수고용직에 대한 세상의 인식과 처우 개선이라는 숙제까지 감당하게 된 듯하다. 덤프트럭 운전자, 간병인, 레미콘 기사, 퀵서비스 기사, 보험모집인, 그리고 학습지 교사…, 스스로는 '위장된 자영업자'라고 부르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는 통계청 집계로는 54만 명이지만, 노동계에서는 200만~2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4대 보험은 물론 산업재해도 인정받지 못하며, 죽을 각오로 나자빠지지 않는 한 사측은 정당한 교섭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상시적으로 영업 성과를 압박 받으며 고용 불안 생계 불안에 내몰리면서도 영업 사무 비품에 사무실 봉지커피까지 자비로 사 써야 한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더없이 매력적인 이 임금노동 형태는, 비정규직과 더불어 고용시장 피라미드의 가장 하층부를 형성하면서 자본의 성채, 거대자본의 이윤을 떠받치고 있다. 그럼으로써 너절해진 자본의 윤리, 참담해진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 그 현실이 바로 내일 바로 '당신'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을 그 천막은 힘겹게 움켜쥐고 있었다.
"혜화동 본사 앞에서 여기로 농성장을 옮긴 게 2010년 11월이었어요. 여긴 시민들의 눈과 귀가 많아 외진 본사 앞보다는 선전 효과가 크고, 용역 직원들의 압박도 덜해서 좋아요."
그는 농성장 한 켠의 휴대용 가스렌지를 켰다. 렌지 위 밥솥에서 데워진 물이 호스를 타고 은박매트 아래를 돌면서 바닥을 데우는 간이 온돌. 침낭 덮고 누우면 그 온기만으로도 겨울 나는데 한결 낫다고 했다. "물이 아니라 수증기가 도는 거예요. 아주 추워지면 수증기가 호스 안에서 얼어버리기도 해요. 그렇다고 발전기를 돌려 난방을 하자니 돈이 너무 많이 들고…." 물론 불법이다. 걷어내라면 걷어내면 그만이고, 재작년까진 저거 없이도 겨울 났다고 그는 말했다.
저 노래 '내가 왜?'를 그는 싫어한다고 말했다. "슬프고 처량맞잖아요. 딱 우리 이야기이긴 한데, 마음까지 추운 건 아주 잠깐씩 스쳐가는 느낌일 뿐이에요. 노랫말 같았으면 우리가 지금껏 버틸 수 있었겠어요?"
올해 초 농성 조합원 한 명(고 이지현씨)이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로 남은 이는 11명. 지방 사는 이들을 제외한 약 절반이 당번을 정해 농성장을 지키며 연대집회에도 참가하고 선전전도 벌인다. 연대 농성을 해주는 동지들도 있다. 조촐한 술자리라도 마련되면 한 길 건너 서울 강북 최대의 유흥구역인 북창동의 여느 떠들썩한 술자리 못지않게 흥겹고 따뜻해진다.
"대교 구몬 등 다른 학습지 조합원들이 올 때도 있어요. 술 한 잔씩 마시다 보면 서로 자기네 교재(敎材)가 좋다며 티격태격하기도 해요. 그러다 '지금 우리가 뭐하고 있냐'며 함께 웃죠. 재능교육 불매운동도 했지만, 뭐 어쨌건 그건 회사가 나빠서지 우리 교재나 선생님이 나빠서 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 첫 직장이 여기였어요. 가르치는 일과 영업하는 일이 제겐 잘 맞았어요. 노조 초기 '교재개선위원회'라는 걸 만들어 우리끼리 토론하면서 잘못된 내용 개선안을 작성해 사측에 전달하기도 했죠. 그 땐 정말 우리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부당한 것들도 하나씩 개선되리라 믿었고요. 그랬는데…. (…) '아, 이거구나' 하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해요. 수당 좀 더 받고 덜 받는 것보다 그때 경험했던 신명과 보람을 되찾고 싶은 마음. 제게는 그게 희망입니다."
외국인의 왕래가 잦은 서울 도심, 고궁의 운치와 도시 미관을 해치고 보행자들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주장, 법과 권력이 편파적으로 편드는 이들이 실정법을 앞세워 떠미는 힘에 밀려 그들은 또 한동안 길 바닥에 나앉게 될지 모른다. 물론 그런다고 농성장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권리와 의무, 몫과 부담의 분배가 온당하지 않다고, 이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농성장을 지탱하는 것은, 공권력이 걷어내려는 지지목과 비닐이 아니라, 그들의 항변에 동조하는 시민들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선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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